고건 국무총리와 청와대측은 24일 하루를 기(氣) 싸움으로 보냈다. 물러나기 전에 각료 제청권을 행사해달라는 청와대의 거듭된 설득에, 고 총리는 사표제출이라는 최후의 카드로 버텼다. 결국 청와대는 손을 들었고, 여권 일각이 추진하던 조기개각은 무산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총선 압승과 직무복귀 후 국정2기의 첫 발을 내디디자 마자 생채기를 입고 뒷걸음을 하게 됐다.이날 출근 후 첫 일정인 오전 8시30분 총리실 간부회의. 고 총리는 "물러나는 총리의 제청권 행사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공식 입장을 언론에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전날 청와대측이 고 총리에 대한 설득과정을 공개하면서 우회적으로 압력을 가한 데 대한 대응으로 해석된다. 고 총리는 또 '삼고초려'를 위해 이날 찾아오겠다는 청와대 김우식 비서실장에게 "올 필요 없다"는 메시지도 전한 셈이다.
그러나 김 실장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거절을 무릅쓰고 오후 3시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을 찾아 고 총리를 대면했다. 김 실장이 다시 한 번 제청을 요청하자 고 총리는 "대통령에게 누가 될 것"이라는 그간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고 총리는 이어 대통령과의 충돌로 비치는 것을 의식한 듯 "미안하지만 입장을 바꿀 수는 없다. 거듭 죄송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10여분만에 끝이 났다. 김 실장은 각료 제청 대신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며 건넨 고 총리의 사표만 받아 쥐었다.
공관에서 집무실로 돌아온 고 총리는 공보수석실을 통해 "그 동안 도와주신 국민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는 대 국민 담화문을 발표해 사퇴를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할 때까지 총리 업무를 계속 수행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청와대는 고 총리의 사표제출 소식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특히 "결국 총리가 제청권을 행사할 것"이라며 강경론을 펴던 참모들은 책임론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이들은 대부분 고 총리의 헌법정신 강조를 수사(修辭)로만 보고 강수를 예상하지 못했다. 반면 고 총리는 흘러나오는 개각구도를 언론보도로 접하며 불만을 쌓아온 것으로 보인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고 총리의 입장을 그대로 전하면서도 "사표수리 시점은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25일 고 총리와 조찬을 함께 하며 직접 사태 수습에 나선다. 여권 일각에선 처음부터 원칙 일탈로 빚어진 문제이기에, 노 대통령이 원칙으로 돌아가면 수습될 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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