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카타르시스 충족.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인기를 끄는 것도 주인공과 비슷한, 결혼의 압박에 시달리는 동시에 험난한 직장생활까지 해 나가고 있는 싱글 여성의 마음을 꿰뚫었기 때문 아닐까. 싱글 여성 3명이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이 드라마 이래서 본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 "요즘 남자 요즘 여자, 모두 꼬리 아홉 달린 여우"
/박은미 (29·홍보 프리랜서)
요즘 남자들, 연애 할 때는 섹시하고 어린 여자를 선호하면서 결혼 상대자로는 교사나 공무원을 찾는다. 여자도 머리 굴리기는 마찬가지. 외모는 "데리고 다니면 쪽 팔리지 않을 정도"면 되고 중요한 건 경제력이다.
신준호(유준상)는 여자의 집안도 외모도 직업도 따지지 않고 무작정 일편단심인 왕자형 주인공과 다르다. 신영을 좋아하긴 하지만 신영보다 어리고 나긋나긋하고 돈 많은 여자를 노골적으로 찾는다. '옥탑방 고양이'의 김래원보다 더 느물느물하고 머리 굴리는 인물. 요즘 남자들 대부분이 이렇지 않나?
이신영(명세빈)도 마찬가지. 첫사랑 준호가 의사인데다 제법 번듯한 외모를 갖고 있음에 안도하며 그와 잘해 보려 애쓴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건에 휘말려 사이가 틀어진 후 이렇게 선언한다. "다신 안 볼 거니까 확 까 놓고 말할게. 사실 난 널 잡고 싶었어. 널 내 남편으로 만들고 싶었다구. 나도 잘못했어. 널 좋아하기 보다는 필요로 했으니까. 오늘 밤의 이 쪽팔림으로 우리 관계는 끝이다. 잘 가라. 신준호." 이런 솔직함이라니. 하지만 조건이 좋다고 무조건 마음 주는 것도 아니다. 집안 빵빵한 지훈(이현우)이 접근하지만, 그가 이혼남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관심 갖지 말고 연락하려 애쓰지도 마라"고 못박는다.
# "서른 넘도록 결혼 안 한 건 정말 잘못한 일일까?"
/김정은 (32·대학원생)
주변 사람들은 신영을 끊임없이 무시한다. 이유는 하나. 32세가 될 때까지 결혼도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평생 그러고 살아라. 서른 다섯, 마흔까지 평생 노처녀로 있어봐라 그렇게."(준호가 자신을 기사거리로 이용했다고 화내며)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죽은 뒤 15일만에 시체로 발견 될 거냐. 나는 결혼해서 벌써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는데 너는 뭐냐."(신영 올케의 대사) 이런 언어폭력을 고스란히 참아내야 한다. 결혼이 여자가 꼭 풀어야 할 과제인 듯 끊임없이 강요하는 분위기는 마음에 안 든다.
드라마 '섹스&시티'나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비슷하다는 점도 거슬린다. 부녀자 투신자살 현장에 출동한 신영은 사건 주인공이 자신의 동창임을 알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과 환상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나는 이제 다른 길에 대한 미련을 버렸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멋진 내레이션은 '섹스&시티'에서 주인공 케리가 했던 독백과 비슷하다. 신영 올케의 대사도 '섹스&시티'에서 미란다가 아파트의 전 주인이 죽은 지 2주만에야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 "회사가 옷 차려 입고 와서 연애나 하는 그런 곳은 아니잖아요"
/서상희 (29·KTF 사원)
신영은 남들이 보면 모두가 부러워할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사고 치고 회사에서는 늘 '물먹는' 인물로 나온다. 그래서 현실감 있다. 옷만 잘 차려 입고 출근해 우아하게 보내다가, 칼퇴근하고 연애싸움이나 벌이는 기존 드라마와 달리 '직업인'으로 고민하는 방송기자 이신영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사실 여성이 직장생활을 해 나가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능력을 인정받아 벼락 승진하는 사람도, 사주(社主) 아들과 눈 맞는 일도 거의 없다. 계약직 사원이 이런 저런 아이디어로 정사원이 되거나('유리구두'의 김현주), 느닷없이 본사 직원에게 인정 받고 정사원으로 실력을 발휘하는('불새' 이은주) 등 마냥 승승장구하는 설정이 아닌 점이 마음에 든다.
나이 제한에 걸려 사촌동생의 신분증과 이력서로 파트타이머로 취직한 순애(이태란) 역시 일을 해야만 하는 요즘 여성들의 씁쓸한 현실이고, 재벌집 며느리가 됐던 승리(변정수)가 맞바람을 피워 혼혈아를 출산하는 것도 부유층의 타락과 혼란을 제대로 그리고 있다.
/정리=최지향기자 misty@hk.co.kr
■ 신영의 명대사들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즐겨 보는 여성들은 "대사, 특히 신영의 내레이션에 100% 공감하고 있는 나 자신에 깜짝 깜짝 놀란다"고 입을 모은다. 시청자들이 꼽는 명대사들을 모아 봤다.
#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것도 다 시간 지난 후의 얘기지. 지금은 그냥 아픈 만큼 망가지는 것 같아."(신영)
# "정말 인연이란 게 있다면 노력 안 해도 찾아와 주지 않겠니? 피하려고 해도 마주치고, 달아나려 해도 날 붙잡는 뭔가가 있겠지."(신영) "그딴 게 어디 있냐? 능력 있는 놈이 채는 거지."(승리)
# "실연은 배부른 슬픔이었네요.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인 것 같습니다. 인생이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일 아침 일어나 두 다리로 걸어갈 곳이 없고, 걷고 보고 들을 수 있으니 끝은 아닌가요? 보이는 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행복한 웃음. 내가 지금 스물 두살이라면 다리가 이렇게 후들거리지는 않을 텐데, 마흔 두살은 아니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신영)
# "멀쩡한 남자들은 다 어디 갔나요."(순애) "애초에 그런 남자들은 태어나지도 않았어."(신영)
# "내가 어떡하면 될까. 내가 뭘 어떡해야 맛있는 걸 먹어도 맛있고, 잠을 자도 자고 난 것 같을까. 아침에 눈뜰 때마다 좀 즐거워 봤음 좋겠다. 밤에 잘 때도 마음 좀 편하구."(신영)
# "계절의 여왕 5월에 살을 에고 뼈 속을 후벼 파는 한파가 밀려 옵니다. 사랑은 떠났고 봄은 오지 않습니다. 시베리아 벌판을 헤매는 마음, 이 쓸쓸함이 얼어서 영원히 냉동 보관되면 어찌할까요. 하늘하늘 날리는 꽃잎, 엄동설한의 눈발로 보이는 현장에서 심장에 동상 걸린 이신영입니다."(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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