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당 합당 이후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세상에서 원로라고 부르는 몇몇 사람들이 나라가 지나친 혼란에 빠지지 않고 선거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거두도록 조력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처음에 강원룡(姜元龍)목사가 나, 이태영(李兌榮)여사, 김점곤(金點坤)교수, 양호민(梁好民)씨 등 네 사람을 불러 원로모임을 갖자고 했다. 강 목사님의 주도로 정계, 군, 관계, 학계, 종교계 등을 망라한 60∼70명을 모아 수유리 크리스찬아카데미하우스에서 91년 겨울부터 92년 봄에 걸쳐 세 번 모임을 가졌다. 정당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불러 의견도 듣고 충고도 했으며,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임은 계속되지 못했다.
그 후 내가 한모음회 회원을 중심으로 나이든 60,70대들에게 그 같은 모임을 하자고 해 몇번 하다가 15대 총선 무렵인 96년 4월 '나라를 걱정하는 모임'을 발족하게 됐다. 강영훈(姜英勳) 김삼룡(金三龍) 김옥라(金玉羅) 원경선(元敬善) 이수성(李壽成) 이원범(李元範) 전산초(田山草) 조완규(趙完圭)씨와 나 등이 준비위원이 돼 모임을 만들었다. 그때 선거문화의 후진성을 지적하고 생산적 국회 운영 등을 촉구하는 '15대 국회와 여야 정치인에게 보내는 시국선언'을 두 번 발표했다.
이후 여러 국가 문제들에 대해 토론도 하고 강연도 듣는 모임을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계속해 97년 대선무렵까지 계속됐다. 내가 주로 연락 책임을 지고 사회를 맡았다. 정주영(鄭周永)회장의 초청으로 백두산에 갔을 때 알게 된 고흥문(高興門) 전 국회부의장이 자주 나왔는데 상당히 합리적이고 깨끗한 분으로 열심이었다. 그는 "많이 모이면 안되고 정말 뜻 맞는 사람 10∼20명이 모여 정책도 연구하고 후배들에게 충고도 하고 압력도 줄 수 있게 조직력이 강한 운동을 하자"고 했다. 송월주(宋月珠) 스님은 불도(佛道)만 닦는 것이 아니라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고, 이세중(李世中) 변호사는 늘 모나지 않고 합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구상(具常) 시인, 김몽은(金蒙恩) 신부, 김삼룡 전 원광대총장, 김창순(金昌順) 북한문제연구소장, 김지길(金知吉) 목사, 류달영(柳達永) 선생, 박영준(朴英俊)광복회장, 경제인 박종규(朴鍾圭)씨, 설창수(薛昌洙)시인, 송남헌(宋南憲) 변호사, 손봉호(孫鳳鎬)교수, 이세중(李世中)변호사, 이태희(李太熙) 변호사, 정진경(鄭晋慶) 목사, 조완규 전서울대총장, 조정근(趙正勤) 원불교 교정원장 등이 열심히 나왔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비서실을 통해 원로들을 만나고 싶다고 해 류달영, 현승종(玄勝鍾) 전 총리, 고흥문씨 등이 20여명씩 청와대로 몇 번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청와대 식단은 널리 알려진 대로 칼국수였는데 80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류달영, 현승종 씨는 "민심을 읽어야 한다, 당파싸움 그만하고 인재를 등용하라"는 등 충고를 했다. 김 대통령과 가까웠던 고흥문씨도 대통령에게 껄끄러운 소리를 많이 했다. 그러나 대통령 눈치를 보고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안기부에서도 몇 차례 초청하여 시국 브리핑을 해주기도 했다.
97년 대선을 20여일 앞두고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이회창(李會昌)씨를 이 모임에 초청한 적이 있다. 당부할 것은 당부도 하고 정견도 들어보자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이 씨가 지지자를 50여명이나 데리고 왔다. 그러자 그 정보를 들은 민주당 대변인 정동영(鄭東泳)씨가 "공명선거를 하자는 모임에서 이 씨를 초청해서 정견을 들었고, 칭찬하는 말을 했다"고 비난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났다. 그래서 내가 전화로 "김대중(金大中) 후보도 초청할 것"이라고 하고 사회자인 이세중씨가 이 씨를 소개하는 말에서 칭찬을 좀 한 사정을 설명한 일이 있다. 사실 나는 그 20여일 전에 김 후보의 부인인 이희호(李姬鎬) 여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축배 제의도 한 일도 있었는데, '참 예민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 모이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다소 갈리게 되어 모임을 더 안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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