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무대 위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자식에게 배신 당하고 광야로 내몰린 리어왕(전성환)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바람아 불어라, 폭풍우야 몰아쳐라. 뺨이 터지도록." 하늘이 도운 것일까, 이 특수효과는? 20일 저녁 국립극장 야외무대인 하늘극장 위는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몰려온 관객은 장대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극장에서 나누어준 1회용 우비를 입고 기다렸다. 조명기 한 대가 터지는 등 악조건이었지만, 배우들은 미동도 않고 극을 끌고 나갔다.
이윤택이 이끄는 연희단거리패는 셰익스피어의 뼈와 살을 발라 정수만을 관객에게 전달했다.
떠들썩한 시장 좌판 같은 셰익스피어 무대가 무슨 정수냐고 따질 수 있겠지만, 원작의 방대하고 산만한 구조는 보기 좋게 압축되었다.
원작의 피비린내 나는 선정성, 선명한 캐릭터 대비,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키는 음악과 조명이 잘 맞아 떨어졌다.
'리어왕'은 세 번 울린다. 첫 번째 대목은 리어왕이 딸의 패륜에 실성한 뒤 웃통을 벗고서 빗 속을 헤맬 때다. 객석 앞에서 헤매며 횡설수설하던 리어가 역적으로 몰려 두 눈이 뽑힌 글로스터(한갑수)를 만나는 순간,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우린 모두 울면서 세상에 태어났다…우리들은 세상에 태어날 때, 이 거대한 바보들의 무대에 나온 것을 알고 슬피 우는 거야."
리어가 뒤늦게 막내딸 코델리아를 만나 정신을 차릴 때, 그리고 마지막 조명 아래서 차디찬 시신이 된 코델리아(김소희)를 안고 리어왕이 오열할 때는 관객을 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국적, 무시대의 의상과 세트는 아직도 '리어왕'의 이야기가 보편적인 현재진행형 이야기임을 웅변한다. 리어왕이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전쟁 장면에서 헬리콥터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감동을 안긴 것은 리어왕 역의 전성환(64)이었다. 3년 전 부산시립극단 무대 못지않은 활력과 기운으로 무대를 호령했다. 배우들은 빗물로 질척거리는 땅바닥 위를 뒹굴며 극장을 떠나지 않은 관객에게 헌신했다.
국립극장이 기획한 '셰익스피어 난장'은 다섯 개 극단의 한국식 셰익스피어를 야외극장에 선보이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하늘극장은 바깥의 소음에 무방비 상태였다. 게다가 몇몇 관객은 태연하게 핸드폰으로 통화를 했다. '셰익스피어 난장' 마지막 공연인 '리어왕'은 26일까지 계속된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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