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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슬의 마음을 잇는 책읽기]평생을 책과 함께한 서양 선비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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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슬의 마음을 잇는 책읽기]평생을 책과 함께한 서양 선비의 에세이

입력
2004.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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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싱의 고백: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조지 기싱 지음. 이상옥 옮김. 효형출판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쩔꼬'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이황의 도산십이곡 중에서 학문 수양의 길을 갈 것을 권면하고, 그 방법은 독서라는 것을 알려주는 글이다. 책에서 볼 때는 별 감흥이 없던 이 시가를 도산서원에서 친필 글씨로 보았을 때, 세월을 건넌 묵향이 전해주는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20여년 전 읽었던 '기싱의 고백'을 다시 읽으며 가장 마음에 남는 것도 그가 평생 추구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기 계발의 경주였다. 고전학을 공부하여 대학교수가 되려 했으나, 젊은 날의 실수로 그 기회를 잃어버린 조지 기싱은 글쓰기를 업으로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는 평생을 따라다닌 극심한 가난이었다. 한 조각의 빵을 위해 길거리에서 구걸한 적도 허다했으나 그는 빵을 살 돈으로 책을 샀고, 한꺼번에 좋은 책을 많이 사게 되자 운반비를 아끼기 위해 한 시간이 걸리는 서점에서 집까지의 거리를 혼자 세 번에 걸쳐 직접 나르기도 한다.

그랬던 그에게 노년에 행운이 찾아왔다. 친구가 약간의 유산을 물려준 것. 그는 런던 뒷골목의 험한 하숙집을 벗어나 데번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해뜰 무렵 맑은 공기 속에서 산책을 즐기고 서재 벽난로 앞에서 한 잔의 차와 함께 독서와 집필을 하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

헨리 라이크로프트라는 가공의 작가를 화자로 내세운 기싱의 자전적인 에세이집은 약 100여편의 글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모든 글이 계절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곳이나 펼쳐 한 편씩 따로 읽어도 될 만큼 서로 독립적이다. 주제도 매일의 삶에 대한 생각, 책과 독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친화성에서 영국의 사회, 문화, 관습에 대한 비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자연과 합일하는 삶에 대한 기쁨이나 과거에 대한 회고보다 청소년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19세기 말 영국의 산업사회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의식일 것이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한 경제적 번영에서 오는 당시의 들뜬 영국사회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후반부터 경제 발전과 침체, 그에 따른 정신적 동요를 겪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또한 계급사회를 인정하고 영국의 귀족계급에서 사회적, 도덕적 우월성을 찾는 그에게서 인간의 한계나 당대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선택했으나 혹심한 빈곤과 고통에서 때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와 시기도 느끼지만 자기가 선택한 길을 꿋꿋이 간 기싱, 그의 자전적 글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싶어 붙잡게 되는 책이다.

강은슬/대구 가톨릭대 도서관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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