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생활 이후 남자를 상대하지 못해 여태껏 혼자 살았어요.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아들 딸 낳고 편하게 잘 살았겠지만…" 10대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성 노예 생활을 강요 당했던 북한의 리상옥(78) 할머니는 참았던 설움이 북받쳐 오는지 남한 동포들 앞에서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서울 대회에 참가하러 20일 서울에 온 리 할머니는 21일 오전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프라자 1층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군에게 끌려가 당해야 했던 뼈에 사무친 기억을 생생하게 토해냈다.
리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열 일곱 살 나던 1943년. 고향인 황해도 신평군에서 다섯 식구가 단란하게 살던 중 갑자기 어머니가 병으로 죽고 아버지마저 일본군에 끌려가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리 할머니도 어쩔 수 없이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하루는 한 일본인이 자기와 함께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리 할머니는 돈이 있으면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겠다 싶어 따라 나섰다. "일본인을 따라 트럭에 올라타니 15명의 여성들이 있었어요. 도중에 12명을 내려놓은 뒤 3명을 태우고 밤새 산속을 달려 외딴 곳 어느 집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 곳이 바로 위안소였지요."
리 할머니는 그곳에서 1년여 동안 지옥과 같은 성 노예 생활을 했다. 일본 군인들은 떼로 몰려와 강제로 관계를 맺는 것은 물론이고 머리카락을 몽땅 자르고 온몸을 때리며 심지어 담뱃불로 지지는 등의 잔혹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리 할머니의 왼쪽 팔과 다리에는 아직도 그 때 입은 흉터가 남아있다. 고통스런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날 위안부였던 한 처녀가 일본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머리 속에는 '이대로 있다가는 나도 저처럼 죽겠구나'하는 생각 뿐이었다. 리 할머니는 죽음을 무릅쓰고 다른 처녀와 야밤에 탈출을 시도했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리 할머니가 입은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았다.
리 할머니는 "세상의 수많은 청년들이 다 죽었다. 나는 그들을 대표해서 여기에 온 셈이니 일본 정부는 나와서 무릎 꿇고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제 만행에 대해 모두가 힘을 합쳐 하나가 되자"는 마지막 당부를 하는 그의 눈에는 누구도 달랠 수 없는 회한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황재락기자 find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