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보세요.당신이 우리 가족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당신이 잊혀지기는커녕 더욱 또렷이 생각이 납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5월 가정의 달이면 당신의 모습이 더욱 그립습니다. 얼마 전 동생이 조상님들 묘소를 한 곳에 모시게 되었다며 꼭 참석해달라는 말을 하더군요. 먼 곳에 사는 막내만 빼고 여섯 남매가 모였습니다.
새로 장만한 묘지는 멀리 바다가 보이고 햇볕이 드는 언덕에 자리를 잡았더군요. 인부들이 조심스레 조상의 시신을 모셔왔더군요. 당신의 묘소 앞에 서니 말로 형언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고 떨렸습니다. 당신은 생전에 층층시하로 어른들을 모시고 살아야 했지요. "시집살이만큼 서러운 것이 없다"는 말을 체감하면서 젊은 날을 소진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저희 7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어머니가 생전에 했던 넋두리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내가 너희들 도시락도 어른들 눈치 보며 싸주었다. 세월이 지나도 그때 시집살이가 잊혀지지 않는다."
게다가 당신은 장손의 며느리로 남아선호 사상이 심한 시절에 저를 포함해 딸만 줄줄이 셋을 낳았답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얼마나 많은 구박을 당했을까요. 당신은 그때 겪은 마음의 상처가 평생 동안 아물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부터 심한 우울증을 보이셨지요. 마음의 고통을 참고 지내다 생긴 병이겠지요. 저는 그때는 어머니의 심정을 미처 몰랐습니다만 제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인생이 참 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가 저희 곁을 떠난 지 4년이 지나 아버지도 당신 곁으로 갔지요. 저희들은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을 나란히 모시지 못해 마음이 아팠습니다. 두 분은 생전에 금슬이 참 좋았지요. 당신은 아버지의 넉넉한 품을 위안 삼아 어려움을 견뎌냈지요. 묘 이장을 하기 하루 전에 큰 언니 꿈에 어머니가 나타났지요. 당신은 조용히 웃으면서 아버지 등 뒤로 살며시 모습을 숨겼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돼 정말 기뻤나 봅니다. 이제 두 분 나란히 모셨으니 그 곳에서도 다정히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저희들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쉬세요.
/김순남·전남 여수시 봉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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