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오래 됐을까. 이 칠흑 같은 어둠과 고요가…. 갑자기 덜컹 소리가 나며 빛이 비친다. 하얀 안개가 자욱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잠시 후 내려온다. 그리고 원래의 자리에 멈춰 섰다. 다시 덜컹 소리와 함께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덮인다. 새로운 입주자가 들어왔다. 주민들이 조용히 새 입주자를 반긴다.-이 곳에 들어온 걸 환영해요.
-여긴 너무나 춥군요. 조용하구요. 전에 있었던 데는 섭씨 37도의 따뜻하고 활동적인 곳이었는데. 여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일지도 몰라요. 조용하긴 하지만 여기서 우린 반영구적으로 지낼 수 있어요. 밖에서의 삶은 시한이 있잖아요.
-반영구적이라구요? 그렇게나 오래요? 도대체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나요?
-1년 3개월이요. 하지만 모두 다르죠. 한달만에 세상에 나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12년만에 빛을 본 경우도 있어요.
-우린 왜 여기 있는 건가요?
-우릴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서요.
-누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건가요. 밖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하는데요?
-소중한 일,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요. 한달만에 나간 ‘심장판막씨’는 지금 대기업 중역의 심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12년만에 나간 ‘수정란씨’는…, 지금 많이 컸군요, 학교에서 뛰어 놀고 있네요. 난 ‘제대혈’이라고 해요. 백혈병에 걸린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면 나는 이 차가운 곳을 떠나 다시 섭씨 37도의 따뜻한 인체 속으로 들어갈 거예요.
-여긴 도대체 어딘가요?
-생명을 예금하는 곳, ‘인체 은행’이랍니다.
‘생명’이 남을 때 저축해 놓고 필요할 때 찾아쓰는 인체 은행이 우리 주변에 하나 둘 늘고 있다. 사람의 지혜가 깊어지고 과학과 의료기술이 발달한 덕이다. 하지만 아직 말로만 들었을 뿐, 인체 은행의 용도가 뭔지, 얼마나 효율적인지, 문제는 뭔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고 제도적 뒷받침도 크게 부족하다.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곳, 인체 은행의 알파와 오메가를 알아보자.
/사진=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김희원기자 hee@hk.co.kr
■인간도 냉동 가능한가
개구리 사회에 유난히 모험심 강한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올챙이 시절부터 뭍에 오르기를 시도할 정도로 그의 용기는 따를 자가 없었다. 오늘의 모험은 '극저온 여행과 부활'이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먼저 오일 목욕을 한다. 인간이 동결보호제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에 다이빙한다. 순간적으로 개구리는 얼음이 됐다. 그의 용기를 높이 산 인간이 그를 다시 찬물에 담가 녹인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다. "결국 죽었나?"는 애도 분위기가 엄습하는 순간 개구리가 다리를 움찔거린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뛰기 시작했다….
몇 년 전 한 TV프로그램은 실제 개구리를 통째로 냉동했다가 해동하는 실험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돈을 보관하는 은행의 핵심 기술이 '보안'이라면 인체 은행은 냉동 기술에 의해 존재한다. 어떻게 하면 세포가 손상되지 않도록 냉동했다가 다시 녹일 수 있을까? 개구리까지 냉동할 정도라면 사람이 불가능하랴.
세포 냉동의 관건은 수분 처리다. 세포는 70∼80%가 수분으로 돼 있어서 이를 얼리면 물이 결정이 되고, 얼음 결정이 세포막을 찢어 세포가 손상된다. 난자든, 정자든, 제대혈이든, 냉동 보관되는 세포나 조직은 물을 빼고 동결보호제를 넣어 얼리는 과정을 거친다.
간단하다! 대형탈수기, 동결보호제, 대형냉동고, 액체질소만 있다면 당신도 냉동인간이 될 수 있다! 경고 한마디 ; 어린이든 어른이든 절대 따라 하지 말 것! 미국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에는 수십명의 냉동인간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이중 다시 살아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현재 의학으론 녹아서 다시 걸어 다닐 확률은 '자의적으로' 말해 0.00…283%다.
수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사람과 한 개의 세포를 얼리는 것은 우주여행과 높이뛰기의 차이쯤 된다. 생물체란 복잡다양해서 세포에 따라 수분을 얼마나 빼고, 동결보호제를 얼마나 어떤 속도로 주입하며, 냉동온도를 몇 도로 할 때 가장 손상이 적은지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연구자들 말로 "발가락으로 액체질소에 집어던져도 산다"는 정자는, 18세기부터 냉동이 시도돼 축산업에 먼저 적용되다가 1953년 냉동정자를 이용한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다. 반면 난자는 불과 6,7년 전에야 효율적인 냉동기술이 확보됐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세포로 이루어진 장기는 아직 안전하게 냉동하는 방법이 없다.
1997년 '유리화 난자 동결법'을 개발, 미 불임학회 우수논문상을 받은 차병원 정형민 세포유전자치료연구소장은 이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쥐를 5,000여마리쯤 잡았다. 새벽마다 소 도축장을 찾아 소의 난소를 떼어와야 했던 한 연구원은 진저리를 치고 연구소를 떠났다. 정 소장은 "난자는 지름이 120㎛(0.12㎜)나 되는 대형 세포여서(정자의 지름은 5㎛다) 수분량이 많고, 세포분열하면서 배란되는 불안정한 세포라 냉동이 어려웠다. 정자를 얼리는 방법대로 난자를 얼려보면 대부분 염색체를 잡고있는 방추사가 끊어져 염색체 이상을 일으켰다. '유리화 동결법'이란 직접 고안한 동결보호제로 2분만에 빨리 물을 대체하고, 곧바로 액체질소에 넣음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현재 기술로는 세포(정자 난자 수정란 적혈구 등)와 한 종류의 세포로 이루어진 조직(뼈 연골 피부 근막 판막 등) 정도만 냉동할 수 있다. 장기도 냉동이 어려우니 개체를 통째로 얼리는 것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모험심 강한 개구리'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는 신의 은총을 받고 부활한 특별한 경우였을까? 이 실험을 직접 주도했던 정 소장은 "냉동된 개구리는 잠시 동면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한다. 동면하는 동물은 체온, 심장박동, 호흡 등이 극히 낮은 상태에서 먹지 않고 수개월간 겨울잠을 잔다. 개구리는 액체질소에서 원래의 동면 시스템을 가동해 잠시 버텼을 뿐이다. 그것도 신경망이 극도로 단순한 하등동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개구리를 얼린 채 계속 냉동고에 넣어두면? 신은 그렇게 무모한 동물까지 보살필 여력은 없을 것같다. 인간을 냉동한다면 다른 건 젖혀두고라도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뇌 세포를 살릴 길이 없다.
/김희원기자
■누구나 '10억 만들기'의 꿈을 꾸는 세상이고 보니, 나면서부터 은행통장 하나쯤 없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엔 돈 맡기는 은행만 있지는 않다. 이 은행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것도 첫 울음을 터뜨린 순간부터 이용할 수 있다. 이자가 붙지는 않지만 대신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바로 사람의 신체 일부를 보관해 주는 곳, 인체 은행이다. 자기가 스스로 쓰기 위해서, 또는 병든 다른 사람을 위해 세포나 조직을 맡겨두고 받아쓸 수 있는 은행들이다. 인체 은행의 종류와 쓰임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다.
■'제대혈 보관' 인기속 주목받는 인체은행
"나 태어났어요"-제대혈은행
인체 은행을 이용할 수 있는 최초의 순간은 탄생 그 직후다. 자궁 속 엄마와 나 사이를 이어주던 탯줄 속 혈액인 '제대혈'의 보관은 요즘 '가장 선호하는 출산 선물'로 꼽힐 정도로 인기다. 제대는 탯줄의 한자어. 100쭬에 불과한 이 혈액에 뼈(골수)보다 5∼10배 높은 농도의 조혈모세포(혈액을 만드는 세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조혈모세포는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등의 치료 수단이다. 아기가 태어난 직후 배꼽쪽 탯줄을 끊고 바늘만 꽂으면 1분만에 혈액이 멸균 백에 담기고, 처리과정을 거쳐 냉동된다.
우리나라 첫 제대혈은행은 1997년 성모병원에 생겨 무상 기증하고 필요한 환자에게 제공됐다. 하지만 최근엔 자기 아기에게 병이 날 때를 대비한 '자가 제대혈은행' 업체가 10여개 생겨 성업중이다. 15년 보관에 150만원 정도 든다.
희귀 혈액-적혈구은행
성인의 혈액도 예치한다. 조혈모세포 때문이 아니라 수혈해야 할 때를 대비해서다. 혈액원이 상시적으로 헌혈을 받고 실비로 공급하지만, 냉장 보관하는 혈액은 보존기간이 35일에 불과해 '은행'이라기보단 '유통기관'인 셈이다. Rh음성 등 희귀 혈액자가 혈액원만 믿고 살긴 불안하다. 또 에이즈 등 감염사고도 불안하다. 그래서 40여명이 국내에 유일한 세브란스병원 적혈구은행에 피를 맡겨두고 있다. 5년간 2봉 보관에 60만원이 든다.
"아이를 맡깁니다"-정자·난자·수정란은행
정자와 난자, 수정란 등 생식세포도 주요한 예치 품목이다. 물론 2세를 낳기 위해서인데, 아이가 없는 암환자가 생식세포를 예치했다가 치료가 끝난 후 찾아서 아이를 만든다. 사고를 당했거나, 불임시술때 부부의 주기를 맞출 수 없을 때도 예금했다가 쓸 수 있다. 정자가 없는 남성 불임환자를 위한 '공공 정자은행'도 있다. 남의 정자를 받아 수정했더라도 엄마의 유전자는 물려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입양보다 선호하는 부부를 위한 것이다. 차병원, 삼성제일병원, 미즈메디병원 등 불임시술을 하는 병원이 이런 은행들을 운영하며, 서울대병원 부산대병원은 정자은행을 보유하고 있다.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조직은행
시신에서는 세포가 아니라 조직을 얻는다. 종류는 무척 많다. 다리뼈를 통째로 떼어 골종양, 골수염 등으로 뼈를 잘라낸 환자에게 이식하기도 하고, 뼈를 잘게 부숴 인공관절, 임플란트 이식, 골절 부위에 다져넣기도 한다. 널찍한 등에선 피부를 떼어 화상 치료에 쓴다.
심장에선 피의 역류를 막는 판막을 떼어 심장판막환자에게 이식한다. 심장 대동맥에서 갈라져 나온 장골동맥과 장골정맥 등 비교적 굵은(지름 2㎝) 혈관도 떼어서 냉동한다. 간이나 콩팥 등 장기 이식땐 혈관을 이어붙여야 하는데 혈관이 짧아 난처한 경우가 있다. 이 때 냉동됐던 혈관이 요긴하다. 아킬레스건도 건이 손상된 환자를 위해 예치된다. 이밖에 뇌막 근막 심장막 등도 보관한다.
간혹 정형외과 성형외과 등에서 떼어낸 대퇴골두나 턱뼈 일부가 기증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밖에는 죽은 뒤 다른 사람을 위해 기증하는 것이다. 이식을 위한 장기는 뇌사(腦死) 즉 심장이 뛰고 있는 동안 재빨리 떼어내야 하지만, 이런 조직들은 부패되기 전에만 적출하면 된다. 1999년 설립된 개인 업체인 한국조직은행이 그간 16명의 시신 기증을 받았다. 지난해 제정된 '인체조직 안전 및 관리 등에 관한 법률'의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삼성제일병원과 성빈센트병원 등이 조직은행 설립 인가를 신청한 상태다.
아픈 세포들 모여라-연구용 은행들
사람에게 직접 쓰이진 않지만 질병 연구를 위한 은행도 있다. 서울대병원 암연구소에 있는 한국세포주은행에는 숱한 생명을 앗아간 별별 암세포주가 보관돼 있다. 부산대엔 노화조직은행이, 가톨릭대엔 백혈병 세포 및 유전자 은행, 고려대엔 폐조직은행이 있다. 기초의학분야에선 사람의 것은 아니나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각종 미생물, 병원균, 알레르기 항원 등을 보존, 질병 퇴치를 위해 연구하고 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숫자로 본 인체은행
1㎖=50,000,000개
정자은행은 1,2번의 자위행위로 얻은 정액을 1㎖짜리 병에 담아 보관한다. 여기에 든 정자의 수는 5,000만개. 우리나라 인구와 맞먹는다. 차병원에 900명, 삼성제일병원에 500명이 정자를 보관해두고 있다. 국내 정자은행을 모두 헤아리면 냉동된 채 잠든 생명의 씨앗(정자)은 수천억개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배우자가 아닌 사람에게 정자이식을 할 기회는 10∼20회로 엄격히 제한된다. 나도 모르는 '혈족'들이 수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바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270년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냉동생물학자인 존 크리스터는 액체질소에서 보관된 세포가 기능의 이상 없이 유지될 수 있는 기간을 계산해 "270년간 안전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271년째부터는 세포 유전자 말단부위(텔로미어)가 소실돼 세포의 안정성을 잃기 시작한다는 계산. 극초저온의 보관은 반영구적이라는 뜻이다.
-196도
정자, 난자, 수정란, 혈관, 근막, 제대혈 등은 '극초저온 냉동고'인 액체질소탱크에 보관된다. 원래 기체인 질소가 엄청난 압력으로 액화한 온도는 영하 196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세포는 액체질소 속이 아니라 액체질소가 기화한 냉기 속에 보관되는 것이라 영하 190∼195도를 유지한다. 온도는 24시간 감시되며 액체질소가 다 날라가면 경보가 울리게 돼 있다.
-80도
뼈나 혈액은 '초저온 냉동고'인 영하 70∼80도에 보관된다. 액체질소가 아닌 전기 냉동고이다. 정전을 대비해 냉매 저장탱크가 따로 달려있어야 한다. 분말 형태의 뼈나 건조 포장된 피부는 실온에서 보관할 수 있다.
12, 24시간
난자는 채취된 지 12시간 내에 수정되거나 동결되어야 한다. 시신에서 뼈, 피부 등을 적출해야 하는 시간도 마찬가지로 12시간 이내다. 단 냉장보관했다면 24시간내 적출하면 된다. 제대혈은 실온에서 24시간 내 가공처리해 동결된다.
2억8,000만원
4년 전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의 말을 빌어 인간 신체로부터 가공된 조직제품은 650여가지로, 가격을 모두 합하면 약 7만파운드(1억4,000만원), 뼈까지 합하면 그 배인 2억8,000만원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에서 통뼈가 8,000만원, 뼈가루 15㏄가 30만∼40만원으로 유통되고 있음을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숫자다.
■기적의 인체
살아 생전 돈을 내고 자기 세포를 보관하든, 기증을 하든, 인체 은행의 목적은 단 하나다. 바로 생명을 예금하는 것이다. 건강한 정상인에게는 신체가 꾸미는 대상일 수 있으나 병자에겐 인체 은행에 보관된 신체 일부가 곧 생명이다.
버려질 탯줄이 생명을 구하다
백혈병 환자인 예은(14·가명)이는 한달 전만 해도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지난해 3월 처음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 항암치료를 계속해 왔지만 완치수단인 조혈모세포 이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은이에겐 언니도, 동생도 있었지만 모두 조직적합성 항원이 일치하지 않았다. 한국조혈모세포은행과 일본의 은행까지 훑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얼마나 황당했는지요. 무슨 생각이 들었냐구요? 지금이라도 예은이 동생을 하나 더 낳아야겠다는 것뿐이었어요." 그러고 보면 예은이 엄마 박모씨는 한번도 절망한 적이 없었다. 동생을 낳아서라도 예은이를 고치겠다는 생각뿐이었고, 시간이 기다려 주기만을 기도했던 것이다.
희망은 이럴 때 찾아왔다. 바로 이름 모를 아기들이 남겨놓은 제대혈이었다. 제대혈엔 골수보다 많은 조혈모세포가 들어있어 백혈병 치료에 효과적이나 예은이는 뒤늦게 발병한 경우라 제대혈의 양이 부족했다. 주치의인 삼성서울병원 구홍회 교수는 2명의 제대혈을 동시 이식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제대혈은행에서 조직적합성 항원 6개 중 5개가 일치하고, 혈액형이 B형인 제대혈 2개를 찾아냈다. 예은이는 국내에서 소아에게 2명 이상의 제대혈을 이식한 첫번째 사례다.
"사실 괜히 연구대상 노릇만 하는 게 아닐까 너무나 고민 많이 했어요. 하지만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치료엔 다 처음이 있다'는 의사선생님 말씀이 큰 힘이 됐지요. 지금은 얼마나 잘 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요. 하나는 남자아이, 또 하나는 여자아이의 제대혈이래요.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냥 버릴 탯줄로 한 생명을 살리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제대혈 이식 47일째, 예은이의 백혈구 수치는 3,100(정상 4,000)으로 회복됐고 별다른 부작용도 없다. 약 때문에 식욕이 당겨 볼살이 붙은 게 내심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힘든 치료과정을 겪은 예은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이젠 괜찮아요"라며 휴대폰 게임에 빠져들었다.
기증으로 영원한 삶을 얻다
충남 서천에서 전도사가 된 조진호씨는 씩씩한 아들 하나를 낳고 신앙과 봉사의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36세, 너무 이른 나이에 막을 내렸다. 뇌종양이었다. 조씨는 죽기 전 한국조직은행에 '시신 기증'을 서약했다. 사망한 뒤 그에게선 팔뼈, 피부, 근막 등이 채취됐고 가공과정을 거쳐 냉동고에 보관됐다. 조씨의 시신에서 뼈가 빠진 자리엔 같은 모양의 보형물이 들어가 원래 모양대로 복원됐고, 장례가 치러졌다.
할머니, 아버지와 함께 월세 10만원의 판잣집에서 사는 초등학생 최모군에겐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꿈이 있다. 그림 같은 부잣집에서 살거나, 실직한 아버지가 멋진 사장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4번이나 수술을 받고도 물리치지 못한 오른쪽 정강이뼈의 종양을 처치하고 싶었다. 그의 눈 앞엔 늘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멋진 골을 넣는 꿈이 아른거렸다.
그러던 최군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왔다. 종양부위를 잘라내고 통째로 뼈를 이식받을 수 있게 된 것. 작은 최군의 잘린 다리뼈는 어른의 팔뼈로 대체됐다. 바로 몇 달 전 사망해 냉동보관된 조씨의 팔뼈였다. 이제 맘껏 축구를 즐길 수 있게 된 최군을 통해 조씨도 두번째 삶을 살고 있다.
2세는 버려지지 않았다
중장비 운전기사인 김모씨는 3년 전 작업 중 사고를 당해 고환을 잃었다. 결혼한 지 몇 달밖에 안 된 새신랑에겐 너무나 큰 불행이었다. 부부 사이엔 아직 아이도 없었다.
하지만 짓이겨진 고환은 버려지지 않았다. 실려간 응급실의 의료진은 김씨를 치료하는 한편 고환을 식염수로 닦고 얼음에 재워 삼성제일병원 정자은행으로 보냈다. 이 곳 정자은행은 고환 속에서 정자를 만드는 가느다란 관 조직(세정관)을 챙겨 액체질소에 냉동보관했다.
김씨는 고환에서 만들어지는 남성호르몬을 주사로 보충해 큰 지장 없는 생활을 회복했다. 그리고 얼마 후 김씨는 보관된 정자를 녹였고 아이를 얻었다. 사고는 당했지만 정자은행 덕분에 자식을 보는 행복은 잃지 않았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인체은행의 딜레마
1800년대 인체가 가장 요긴하게 쓰였던 곳은 해부학 실습실이었다. 하지만 해부실험에 제공되는 시신이 매우 적다보니 시신 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영국에는 빈민의 무덤을 도맡아 도굴하는 '부활업자'가 있었는가 하면 살인으로 시신을 '생산'한 이들이 처형된 기록도 있다. 1828년 영국 하원의 증언 기록에 따르면 6∼7명의 부활업자로 구성된 조직이 한 해 312구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 해부학자들에게 팔아넘겼고 그 대가로 1,000달러 정도를 벌어들였다.
200년 전이라서 일어난 일만은 아니다. 3월7일자 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미국 의대들이 연구용으로 기증된 시체의 상당수를 피부·뼈·혈관 등을 가공하는 업체나, 의약품 부작용을 실험하는 제약사로 넘기는 실태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시체 한 구 값은 20만달러(2억6,000만원).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도 한 대학병원 교수가 연구용으로 기증된 시신에서 뼈, 피부 등을 떼어내 의료용품 제조업체에 2,500만원을 받고 넘긴 혐의(약사법 위반)로 입건됐다. 이 때만 해도 조직 매매를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기 전이었는데, 당사자들은 "부족한 인체 조직을 어떻게 공급하란 말이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가공업체가 국내·외에서 기증과 밀매 등 다양한 경로로 손에 넣은 조직 중엔 치명적인 감염 사망자의 피부조직도 포함돼 있었다.
'죽어서 다른 생명을 구한다'는 소중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추악한 인체조직 매매가 이루어진다. 수요는 절실하나,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암시장은 필연적 결과다. 인체조직은 모두 합법적으로 '기증'되는 게 옳다. 올해부터는 장기뿐 아니라 조직과 세포에 대한 매매도 엄격하게 규제된다. 하지만 인체조직 기증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히 두텁다.
A씨는 한국조직은행에 생전 시신기증의사를 밝혔다. 가족으로부터 A씨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기증파트의 코디네이터는 부랴부랴 영구차를 확보하고(시신은 앰뷸런스로 옮길 수 없다) 관련 서류를 챙겨 영안실이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조직을 적출하고 가공할 부천의 수술장에도 전화를 넣어 소독 준비를 일렀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그의 마음은 내내 조급했다. 부패되기 전에 병력 조사도 해야 하고 각종 동의서를 받고 부천까지 옮겨야 하기 때문.
하지만 도착한 곳에선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A씨의 기증의사를 받아들인 자식과는 달리 집안의 어른들이 "시신에 함부로 칼 댈 수 없다"며 펄쩍 뛰었던 것이다. 유족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끝에 코디네이터는 결국 빈 영구차를 타고 돌아왔다.
기증을 활성화하려면 기증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공공 정자은행'은 남성불임의 2%를 차지하는 무정자증 환자를 위한 것이다. 정자 기증은 한때 '수위 아저씨의 아르바이트' '선배의 강압에 의한 의대생의 고역'으로 여겨졌으나 요즘은 주로 대학생 중에서 기증자를 모집한다. 이들에겐 자위행위의 대가로 5만∼10만원의 차비나 문화상품권을 주는데, 이마저 '매매의 대가'로 볼 경우 정자은행의 존립 자체가 힘들어진다.
한국조직은행의 엄인웅 은행장은 "우리나라 전체의 수요를 감당하려면 약 100명의 시신 기증자만 있으면 된다. 수급이 맞아 가공과 보존에 드는 실비만으로 유통된다면 인체 조직은 수입가의 10∼30분의1 가격으로 공급될 수 있다"고 어림잡았다. 수천만원의 인체 조직이 수입되고, 밀매되며, 안전성까지 우려되는 이유가 100명의 기증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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