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말한 '한모음회' 이야기를 좀더 하고자 한다. 처음 이 모임의 회원은 수십 명으로 시작됐지만 6,7년 동안 수백 명으로 늘었고, 강좌를 겸한 모임이 1992년 말에는 100회를 넘었다. 처음의 취지대로 한민족 공동체의식과 인간 존엄성 및 도덕성 회복을 목적으로 거의 매주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그 때 늘어난 회원들 중에는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각 분야의 진실하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회원이나 강연이나 토론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얼마 전에 작고한 구상(具常) 시인, 강영훈(姜英勳)씨, 김태길(金泰吉) 김흥호(金興浩) 양호민(梁好民) 이영희(李永熙) 이인호(李仁浩) 신용하(愼鏞廈) 진덕규(陳德奎) 이현재(李賢宰) 조순(趙淳) 안병욱(安秉煜) 윤내현(尹乃鉉) 황필호(黃弼昊) 김여수(金麗壽) 교수, 사학자 이이화(李離和), '한살림운동'의 지도자 장일순(張壹淳), 강문규(姜汶奎) YMCA총무, 정주영(鄭周永) 현대 회장, 이재훈(李宰勳) 변호사, 정치인으로는 이종찬(李鍾贊) 유재건(柳在乾) 박찬종(朴燦鍾)씨, 언론인 류근일(柳根一) 박권상(朴權相)씨 등이었다. 우리들의 모임은 주로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힐튼 호텔과 프레스센터에서 있었다.
한모음회 운동의 방향은 모든 사람이 어울려 잘 살 수 있는 사회의 기초를 닦고, 건전한 시민정신과 공동체 의식을 바르게 가꾸며, 민족의 정체성과 국민의 자질을 높이고, 균형 있는 민족문화 발전에 힘쓴다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이런 운동은 민주화투쟁이나 인권운동처럼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거나 언론에 많이 보도되는 이슈가 아니어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일종의 정신문화, 윤리도덕성 회복 운동이므로 끝이 없고,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으니 일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래서 강의나 토론이나 하고, 먼 미래의 눈에 안 보이는 이야기를 자꾸 하니까 조직도 야무지게 발전되지 못하고 늘 모이는 사람만 열심히 모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일반인들이 이 운동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정길생(鄭吉生) 교수와 정근모(鄭根謨) 박사, 이영희 이수성(李壽成) 교수, 전산초(田山草) 박사, 황무임(黃戊姙) 김신일(金信一) 교수, 김영운(金英運) 목사 등과 자주 모여 고민도 많이 했다. 92년 5월 어느날 이수성씨와 팔레스 호텔에서 이 모임을 국민운동 차원으로 크게 확대 발전시켜보자는 논의를 한 적이 있었다. 우선 그 해 말의 대통령선거를 공명정대하게 치러 정치풍토를 바로 잡자는데 공감했는데 이 교수는 40, 50대의 학계인물, 나는 60,70대의 동조자들을 모아 국민운동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 후 한모음회 간부들과 이에 대해 논의하게 됐는데, 그 때는 제대로 못하고 94년에 '나라를 걱정하는 모임'을 만들게 된다.
93년 2월 김영삼(金泳三)씨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며칠 전에 시민운동 대표로 이세중(李世中) 변호사, 송월주(宋月珠) 스님, 나 등 셋을 여의도 민자당 총재실로 초청한 적이 있다. 김 당선자는 좋은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당시 현안이었던 양심수 대폭 석방과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복직을 건의했다. 김 당선자는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언론에 보도됐는데 보수적 성향을 띤 가까운 교육계 중진들로부터 "그런 건의를 왜 했느냐. 그들은 좌경적인 인물이 아니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94년 7월 어느날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정범모(鄭範謨) 장일조(張日祚) 교수 등을 초청해 60여명이 2박3일간 한모음회 수련회를 한 적이 있다. 그 중 어느날 점심 시간이었는데 정신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던 이현재(李賢宰)씨가 큰 소리로 "서 선생, 김일성(金日成)이 죽었답니다"라고 김 주석의 사망소식을 전해와 놀랐다.
그날 모두 강의는 제쳐놓고 TV를 보며 북한의 장래, 남북한관계, 한반도 미래에 대해 밤늦도록 얘기했다. 또 혼란이 예상되는 한민족의 앞날, 거의 필연적으로 다가올 사상이념의 변화에 대비해 한모음회가 미래지향적으로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골똘히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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