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80세를 일기로 별세한 녹촌(鹿村) 고병익(高柄翊) 선생은 해방 이후 국내 역사학계의 기초를 다진 대표 학자이다. 전공인 동양사학을 중심으로 30년 가까이 사학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노년에는 방송위원장, 21세기 한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내며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벌였다.학술원 회원인 그는 노환으로 타계하기 며칠 전까지 학술회의에 참석해 따끔한 말을 아끼지 않을 만큼 지침없이 살아온 원로.
고인은 중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福岡) 고교를 거쳐 1943년 도쿄대 동양사학과에 입학했다. 해방 직후 귀국, 서울대에 입학해 47년 졸업했으며, 이듬해부터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로 교단에 섰다. 한국전쟁 중인 52년에는 피란지 부산에서 역사학회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던 고인은 2002년 역사학회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창립 발기인대회에 참석한 사람의 절반이 군복 차림이었다"고 그 시절의 어려움을 회고했다.
56년 독일에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58년 연세대 교수, 60년 동국대 교수, 62년부터 79년까지 서울대 교수를 지내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63년부터 70년까지 역사학회와 동양사학회장을 지냈다.
고인은 그 시기에 국내 동양사학계의 명저로 꼽히는 '아시아의 역사상'(69년) '동아교섭사의 연구'(70년)를 내놓았다. 74년 학술원 저작상 수상도 이 같은 공로를 인정 받은 것이다. 73년부터 20년 넘게 국사편찬위원과 문화재 위원으로 역사·문화재 전반에 두루 기여한 고인은 82년부터 10년 동안은 한림대 교수를 역임했다.
50대 중반인 79년 서울대 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부터 2년 동안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맡았다. 또 87년과 91년 두 차례 방송위원장, 88년 21세기 한일위원회 위원장과 민주화합추진위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모나지 않은 성격 덕분에 여러 분야에서 두루 활발하게 활동했다.
일찌감치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유네스코 실크로드 자문위원,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장, 문화재원장 등도 지냈다. 저서는 학술서로 '동아시아의 전통과 변용'(97년)과 수필집 '망원경' '선비와 지식인' 등이 있으며 96년 위암 장지연상 한국학 부문상과 97년 문화유산 보호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식민사학 2세대 학자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별세하기 며칠 전인 12일 학술원 50주년 기념학술회의에서도 "평균 연령이 약 70세에 이를 정도로 학술원 회원 모두가 고령이고, 이 때문에 학계에서 회원 자신의 위상과 활동 분야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며 "지도자적 역할에 문제가 따른다"고 지적할 정도로 열성을 가졌다. 이기백 전 이화여대 석좌교수, 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 변태섭 서울대 명예교수와 타계한 천관우 김철준 김원룡 유원동 선생 등이 비슷한 연배의 사학자들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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