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의 기상시각은 꼭두새벽 1시30분. 찬물에 얼굴을 씻고 튼튼한 작업복에 발이 편한 신발과 주머니가 셋 달린 앞치마를 두르면 나의 출근 준비는 완료된다. 의상과 신발의 유행이 숨가쁘게 바뀐다지만 나와는 무관하다.집을 나와 일터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을 때 훅 맞닥뜨리는 새벽기운은 높은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상쾌함과 같다. 5분만이라도 더 눈을 붙이고 싶었던 생각을 멀리 쫓아 버린다. 팔, 다리, 허리가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새벽의 맑은 공기 속에는 원기소가 듬뿍 담겨있나 보다. 건강에 자신이 없던 내가 여러 해 새벽을 달리는 동안 잔병치레 없이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출근하는 시간대는 유별나다.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다. 택시가 있지만 내 처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10년 간 써먹은 방법은 하나. 두 주먹 불끈 쥐고 전력질주를 하는 것이다. 의욕적인 수습기수의 말몰이처럼 있는 힘을 다해 새벽기운 속을 달려간다.
치열한 삶의 현장 나의 일터
나의 일터는 경동시장 나물광장 중턱(신진상회)이다. 새벽은 나에게 초긴장의 시간이다. 새벽 2시까지는 고객맞이 준비를 끝내야 한다. 정돈이 덜된 상태에서 손님을 맞으면 당황하게 된다. 칠보단장도 하기 전에 신방에 드는 칠칠치 못한 첫날밤의 신부 꼴이다. 매일 새벽 죽기살기로 1시 30분에 기상하는 이유이다.
시장은 1년에 설, 추석 등 두 명절에만 문을 닫는다. 나는 시장과 궁합이 맞는 모양이다. 이 두 날만 빼고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시장 번영회에 개근상 제도가 있다면 난 10년 연속 개근상을 독점했을 것이다.
갓 뜯어온 싱싱한 토종버섯이랑 갖가지 토종 나물들이 풋풋한 향기를 풍기는 일터는 사시사철 푸짐하다. 난전바닥이지만 눈과 빗물을 막아주는 지붕이 있으니 다행스럽다. 그러나 의지할 벽이 없어서인지 한 겨울의 혹한은 견디기가 만만치 않다. 수은주가 한낮에도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지는 한 데에서 18시간을 버티다 보면 동태가 되는 듯한 기분이 된다. 손과 발과 그 외의 부위는 껴입고 양말과 장갑으로 감싸줄 수도 있지만 줄곧 간판처럼 내놓고 지내는 얼굴이 문제다. 한 겨울을 견디고 난 얼굴은 해빙기의 밭두둑처럼 볼썽사납게 망가진다. 사는 일이 어설픈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때가 바로 겨울이다.
경동시장 나물광장으로 나온 이후 나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 설과 추석 대목에는 밤이고 낮이고 시장에서 보낸다. 서서 자고 서서 먹는다. 거스름돈을 꺼낸답시고 앞치마의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 넣은 채 번개잠이 들면 코를 골 때가 다반사다. 거스름돈 달라고 손님이 호통치는 바람에 놀라 잠을 깨고 나면 그렇게 멋쩍을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명절 대목 무렵이면 긴장한 탓에 변비부터 생긴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오는 동안 우리집에는 변화가 있었다. 숨막힐 것 같던 단칸 월세방에서 전세방으로 옮겼고 얼마 전엔 좀 더 넓은 전셋집에 옮겨 살게 됐다. 그러나 목표는 아직 아득하다. 여고 2학년인 큰 딸과 여고 1학년인 막내딸의 뒷바라지, 내 집 장만의 꿈과 그리고 우리 부부의 노후대책 등을 모두 실현시켜야 한다.
결혼과 함께 닥쳐온 시련
그이가 경마에 미쳐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둘째를 낳은 후였다. 세상에서 제일 착실한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인줄만 알았다. 하늘만큼이나 믿고 사랑했던 남편한테 속았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도 못할 고통이다. 네 식구 몸담고 지내던 전셋집 보증금까지도 경마도박으로 훌렁 날려보낸 가장의 처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도깨비한테 홀린 묘한 기분이었다. 졸지에 쪽박신세가 되어 보증금이 없는 월셋방을 찾아 사방을 돌아다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친정 어른들은 연애시절부터 그이와의 교제를 반대했었다. 반대했던 첫째 이유는 10년이나 되는 나이 차이이고 둘째는 임시 공무원인 그이의 벌이로는 밥 먹고 살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큰 오빠는 극단적인 폭언으로 그이와 나 사이를 압박했다. "만약 보태달라느니 어쩌니 하면 친정 근처에 올 생각을 마라"며 다그쳤다. 그이는 교과서 같은 성격의 사람이었다. 생김새에도 행동에도 흩어진 구석이 없었다. 나를 공주 받들 듯 하는 그이의 따뜻한 배려도 행복했지만 행동 하나 하나가 꼼꼼해서 맘에 들었다. 반대하고 나서는 친정 어른들 앞에서 나는 기를 쓰며 강조했다. "그이에겐 성실성이라는 평생의 재산이 있으니 우린 꼭 잘 살 것"이라고.
우리집은 거렁뱅이가 됐다. 없는 살림을 알았는지 두 아이는 잠을 자면서도 입을 오물거리며 먹는 시늉을 했다. 소문을 들은 친정 어른들은 위로보다는 서슬 퍼런 비난의 화살을 보내왔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마치 역병을 앓는 집처럼 누구도 기웃거리지 않았다. 찌그러진 창틀 너머로 참새떼의 수다가 들렸다. '지질지재지질재재' 지지리도 구차한 우리의 처지를 비웃는 소리 같았다.
그이는 점점 밖으로만 겉돌았다. 기절할 사실은 그 처지에도 몰래 경마장 출입을 했다는 점이다. 마지막 비상금으로 숨겨둔 금패물까지 탕진한 사실을 알았을 땐 피가 역류했다. 친정 어머니께서 가난한 사위에게 물려 준 각별한 선물이었다. 그날 밤 난 잠을 한 숨도 이룰 수 없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한밤중에 방문을 열고 나왔다. 골목길의 가로등마저 졸고있는 깊은 밤, 하늘에 높이 떠있는 둥근 달이 초라한 내 모습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마치 딸자식을 염려하느라 깊은 밤 홀로 잠 못 이루는 어머니의 눈매 같았다.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아내는 남편을 받들고 섬겨야 그 가정이 바로 선단다."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그이를 따라 나서는 고집스러운 딸에게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주는 듯했다.
현장에서 남편의 덜미를 잡고
경마장행 버스를 탔다. 젖먹이를 등에 업고, 젖 떨어진 아이의 손을 잡고. 마장동에서 뚝섬 경마장을 오가는 69번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뚝섬행 시내 버스의 69라는 붉은 숫자표시만 봐도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곤 했다. 현장 덮치기로 사생결판을 내고 말겠다는 각오가 가슴속에서 불덩어리처럼 끓어올랐다. 어디쯤에 틀어박혀있을 정신 빼앗긴 남편을 생각하니 입안에서 쓴 물이 솟구쳤다. 세 모녀가 땀과 눈물과 먼지범벅으로 넓은 운동장을 기웃거렸지만 결국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그날 이후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아침이면 무조건 69번 시내버스를 탔다. 어느 날 남편은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나갔다.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끈에 끌려가는 형상이었다.
이번엔 작전을 바꿨다. 마권발매창구를 지켰다. 창구가 붐빌 무렵이 되자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마권발매 창구가 여러 곳이어서 한군데만 있을 수 없었다. 젖 떨어진 세살바기를 가슴에 껴안고 뛰어다녔다. 엎힌 아이는 기수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운동장에 경주마가 등장할 무렵 누군가가 다급하게 창구로 다가왔다. 확 뜨이는 얼굴! 바로 남편이었다. 판매창구에 10만원 권 수표 한 장을 내미는 남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느닷없는 세 모녀의 출동에 그이는 몹시 당황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현장에서 그이의 옷지락을 움켜잡았다. "이곳에서 네 식구 함께 죽어버리자"고 울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교양이나 체면은 여유 있을 때의 액세서리일 뿐이다. 영문 모르는 두 아이들은 어미 잔등에서 울고 치맛자락을 잡고 울었다. 세 모녀가 한바탕 통곡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날 밤 남편은 자신의 실수를 고해성사하듯 고백했다.
밑창까지 패어버린 우리집 경제사정은 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참혹한 생존에 불과했다.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남편이 일자리를 어렵게 옮겼지만 남편의 수입으로 생활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경동시장 나물광장으로
한계에 이르렀을 때 길거리로 나섰다. 살기 위한 방법을 찾아서 이곳 저곳 헤매며 궁리를 했다. 가치관까지 바뀌어 버렸다. 비단보에 개똥을 꾸리는 삶은 싫었다. 택한 일이 바로 경동시장 난전의 막일이다. 시장난전에서도 보증금과 월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처음엔 의아했다. 당시 한 평 남짓한 나물광장의, 그것도 안쪽 자리의 불리함을 감수해야 하는 난전을 보증금 500만원에 다달이 30만원을 임대해야 했다. 살아보겠다고 뛰어들고 보니 길은 있었다. 시누이한테 당시 보증금 500만원이란 거금을 빌릴 수 있었다. 살아갈 길을 열어 준 크나큰 은혜였던 셈이다. 그 엄청난 빚을 나는 3년 동안에 무사히 갚았지만 고마운 마음빚은 평생 갚아나갈 계획이다.
자본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엔 또 하나의 난관이 발목을 잡는다. 당시 큰 딸아이가 7세, 둘째가 6세여서 아직 어미의 손길이 필요했다. 위탁시설이나 도우미에게 두 아이를 맡길 형편도 아니었다. 큰 딸애가 아빠 성격을 닮아 유난히 꼼꼼하다는 점이 어떤 기대를 갖게 했다. 일곱살짜리 큰 아이에게 집 지키는 훈련을 시키기로 했다. 집을 비우는 동안 아이가 지켜야 할 7가지 안전수칙을 이렇게 요약했다.
1. 절대로 집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다.
2, 동생 혼자 문밖에 내놓지 않는다.
3. 연탄 아궁이를 건드리지 말 것.
4. 가스렌지는 절대로 손대지 말 것.
5. 아침밥은 아빠와 같이 먹고 점심은 낮 12시에 동생과 먹는다.
6. 오후엔 동생과 같이 낮잠을 한차례 잔다.
7. 틈틈이 글씨 공부와 그림 그리기 놀이를 동생과 한다.
같은 내용을 반복 주입시켰더니 아이는 몹시 투정을 부렸다. 싫증난다고 듣지 않고 귀찮다고 실천하지 않으면 우린 다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어린 종아리에 회초리를 댔다. 벌겋게 부풀어오른 매자국을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진실만이 최고의 상술
진실만이 최고의 상술임을 절감하곤 한다. 한번 찾아온 고객이 다시 찾아와 단골이 되고 가볍게 스쳐간 나그네 손님까지 잊지 않고 다시 찾는 이유는 꾸밈없는 진실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요즘 나에겐 가장듣기 좋은 인사가 있다. "아직 이혼 안했어?"라고 묻던 이웃들이 요즘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언제쯤 빌딩 지을꺼야?" 이웃들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빌딩은 못 지을지라도 몇 년 후면 우리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는 아늑한 내 집이 마련될 것 같다. 두 딸을 위한 대학 등록금도 두개의 교육 적금 통장에서 영글고 있고 노후대책도 준비 중이다.
내 집을 장만하고 두 딸애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친정에 갈 계획이다.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친정 식구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고 싶다.
나른한 봄잠이 솜사탕처럼 밀려드는 오늘도 나는 고산을 정복하는 산사내처럼 치열한 하루를 위해 새벽을 정복한다. 마장동에서 제기동 경동시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달리는 나의 발걸음을 의장대의 횃불처럼 가로등의 불빛들이 응원을 하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간절한 기원을 담는다.
"하나님 더도 덜도 말고 제게 오늘 하루도 땀 흘린 만큼의 대가를 꼭 허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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