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사장을 물러난 뒤 흥사단 공의회장과 한모음회 회장으로 비교적 조용히 지내던 나는 차츰 시민운동에 관여하게 됐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임기 말기에 제도적 민주화의 하나로 시·도 등 각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의회의원을 뽑는 지방자치선거가 5·16 이후 30여년 만에 치러지게 됐다. 그때 시민운동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지방의회가 활성화되고 역할을 제대로 해야 민주주의가 된다는 견해가 퍼져있었다.그런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1991년 3월 5일 프레스센터에서 각계 지도자 300여명이 모여 발기인대회를 가진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였다. 나는 강문규(姜汶奎) YMCA 총무 등과 함께 5인의 공동대표로 선임됐다. 그 때 나는 시민운동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선배 축에 들었다. 시민들이 직접 선거와 의정 감시에 참여하고, 6월 지방의회의원선거에 시민대표를 후보로 내보내기로 했다.
같은 달 18일 서울 YWCA대강당에서 700여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창립식을 가졌다. 규약을 발표하고, 시인 김지하(金芝河)씨가 '시민연대를 위한 십계'를 낭독하기도 했으며, 시민이 방관자의 위치를 청산하고 시민다운 모습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는 '시민선언 1991'도 채택했다. 여러 신문들도 사설 등을 통해 "때묻지 않는 지식인 주도로 참신한 정치세력이 생겨 기성 정치권을 비판하고 지방선거를 공정하게 치르도록 감시하는 역할 등을 기대한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시민연대회의는 우선 서울에서부터 추천후보를 골라 광역지방의회 선거에 출마하도록 하고 지원했다. 강남구에 이영희(李永熙) 인하대 교수와 허명화(許明華)씨, 서초구에 최혜성(崔惠成) 한살림운동 대표, 영등포구에 이정자(李正子) 전 녹색소비자연대 공동대표, 성남에 유승희(兪承嬉)씨, 그리고 부천 시장선거에 부천YMCA책임자였던 이창식(李昌植)씨 등이 출마했다. 강원룡(姜元龍) 목사 등이 나를 종로구에 출마하라고 종용해 이를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고문으로 추대된 강 목사, 공동대표인 강문규씨와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선거운동을 했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성남의 유승희씨와 강남의 허명화씨 두 사람만 당선되고 나머지는 다 떨어졌다. 기성 정당 조직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92년에 정신대대책협의회의 이미경(李美卿)씨 등이 나를 찾아와 일제 하에서 중국이나 남방에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고생했던 할머니들을 돕는 운동에 협력해 달라면서 나를 공동대표로 추대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취지에 공감하고 응낙했다. 정대협을 이끌고 있던 윤정옥(尹貞玉) 이효재(李效才)씨 등과 함께 명동 등에서 전단을 나눠주고 강연회도 하면서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8개월동안 모금운동을 했는데 2억원 정도를 모아 43명의 할머니들에게 250만원씩을 나눠드렸다. 또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서도 같은 취지의 운동을 도와달라고 해 정대협 회원들과 함께 5월 어느날 종로에서 시가행진을 한 적도 있다.
같은 해에 나는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1902년 미국을 갔을 때 처음 정착했던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그곳 교민 대표가 도산 선생이 도미 후 동포들을 교육하며 단결시키던 친목회인 공립협회(共立協會)의 모임 장소였던 교회 건물이 팔릴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이를 막아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곳 감리교 총감독과 시장, 교민 대표를 만나 설득했는데, 시의 문화사적으로 지정을 받았다. 또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徐載弼) 박사의 묘와 기념관을 방문하고 돌아와 미국에서 서재필 박사 기념사업회를 주관하던 현봉학 선생과 함께 국내에서 서 박사 기념사업회를 발기하게 된다.
89년에 창립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서경석(徐京錫) 목사의 간청으로 '시민의 신문' 사장을 2, 3년 맡기도 했다. 경영은 어려웠지만 편집국장을 했던 유종성(柳鍾星)군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열심히 해서 시민을 위한, 시민의 목소리를 담은 주간지로 발전해오다가 뒤에 이형모(李亨模)씨가 사장으로 취임해 지금은 경영도 안정되고 내용과 체제도 손색 없는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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