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지난 14일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기각 결정을 내렸다. 그 판결을 지켜보며 우리가 참으로 먼 길을 달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수립, 6·25 전쟁, 4·19 학생혁명, 5·16 쿠데타, 6월 항쟁, 문민정부 수립 등 모든 과정이 영화의 장면들처럼 스쳐 지나갔다.16대 국회가 대통령 탄핵을 의결한 것은 잘못이고, 그로 인한 국력 소모가 컸지만, 그 과정을 통해 얻은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법의 결정에 승복하는 민주주의 훈련을 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소득이다.
헌재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결정문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대통령의 위법 사항들을 또박또박 추상같이 지적하고, 법치와 준법의 의무를 강조한 대목은 대통령 뿐 아니라 모든 공직자와 정치인들의 교본이 될 만하다.
"대통령의 권한과 권위는 헌법에 의하여 부여 받은 것이며 헌법을 경시하는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가 돼야 한다"는 구절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준엄한 경고장이다.
총선 전 한 열린우리당 의원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얻는다면 노 대통령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대통령이면서도 주류의식을 가질 수 없었다. 다수의석을 가진 야당과 기득권층이 사사건건 자신을 압박한다는 피해의식도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석을 갖게 되면 안정감속에 포용력을 발휘하며 큰 변화를 보일 것이다."
국민은 열린우리당에 과반수 의석을 주었고, 헌재는 탄핵을 기각했다. 노 대통령은 직무정지 63일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그는 대 국민 담화에서 탄핵사태가 자신의 부족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고, 취임 시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으로 국민에게 진 빚을 갚겠다고 말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다. 대통령과 국민, 대통령과 야당의 관계는 변화의 전기를 맞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마무리하면서 이제는 정말 새 정치를 보여줘야 한다.
대통령의 변화를 가름하는 첫 시험대로 총리 임명을 주목할 만 하다. 대통령이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혁규씨를 임명하느냐, 널리 다른 후보를 찾느냐를 지켜보면서 대통령의 변화의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김혁규씨가 총리후보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가 한나라당에서 열린 우리당으로 당적을 바꾼 명분이 분명치 않다. 그를 '철새'라고까지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선거를 코앞에 두고 야당에서 여당으로 옮긴 인물이 총리가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둘째 그의 최근 언행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한나라당이 자신의 총리 임명설에 반발하자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의 적합도를 논의하려면 능력 경륜 청렴도 등을 거론해야지 당을 얘기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총리설이 나도는 사람이, 어제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에 그런 대응을 하는 태도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 실망은 더 큰 실망으로 이어졌다. 그는 "부산시장과 경남지사 재보선에서 여당이 승리하면 대통령이 큰 선물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온 국민이 새 정치를 기대하는 시기에 경남지사도 아닌 총리후보가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 낯 뜨거운 소리다.
셋째 이유는 가장 중요한 것인데, 노 대통령이 그를 총리로 임명하려는 속셈에 '지역배려'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까지 총리 임명에 이런 계산을 할 생각인가. 그런 계산은 개혁대상이 아닌가.
김혁규씨가 정말 아까운 인물이라면 차기 총리로 미루면 된다. 이번 총리 임명은 변화와 상생의 첫 단추다. 반대하는 야당의 입장도 헤아리고, 반대여론에도 귀 기울이는 대통령을 기대한다.
장명수/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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