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정주영(鄭周永) 회장의 비서실장인 이병규(李丙圭)씨로부터 정 회장이 우리 내외를 강릉의 별장으로 초청한다는 연락이 왔다. 초청하는 까닭을 물으니 "하루 이틀 쉬면서 긴요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1991년 7월29일 집사람과 함께 강릉 경포대에 있는 정 회장의 별장 겸 호텔인 비치호텔에 낮 12시쯤 도착해보니 정 회장의 고문 변호사인 오제도(吳制道), 이용훈(李龍薰)씨 내외가 먼저 와있었다.호텔 방에 행장을 풀자 정 회장이 방으로 찾아와 "부인들은 해변가로 나가 바람을 쐬는 것이 좋겠다" 하여 집사람을 내보내고 둘이서 마주 앉게 되었다. 정 회장은 중국 다녀온 이야기를 잠깐 하더니 "지금까지 기업경영을 성공적으로 해왔는데 이제는 국가발전과 국민복지를 위해 정치를 포함한 새로운 사회운동이나 국민운동을 하고 싶다"면서 이 문제를 강구해보자고 말문을 꺼냈다. 나는 정치참여는 안 한다는 나의 평소 소신을 말하고 나서 "정 회장도 갑자기 정치성을 띤 활동을 하면 동조자가 적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온 국민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국민운동이나 사회문화운동은 어떻겠는가"라고 하자 정 회장은 "어쨌든 그런 운동을 앞으로 연구해보자"고 했다. 그 날 밤은 정 회장의 아드님인 몽준(夢準)씨도 오라고 하여 동석한 가운데 회식을 하며 노래도 부르고 즐겁게 보냈다.
다음날 아침 새벽 5시30분쯤 일어나 바닷가에 나가보니 정 회장은 벌서 해변을 몇 바퀴 돌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과연 부지런하시구나"하고 감탄했다. 그날 오전에 정 회장은 오, 이 두 변호사와 함께 한 자리에서 어제 하던 얘기를 다시 끄집어 냈다. 나는 생각했다. '정주영 회장! 이 사람은 한국의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주역을 담당한 특출한 기업인이다. 한국의 혼란한 정치상황이 이런 대기업가로 하여금 국가경영에 보다 깊이 관여하고자 하는 의욕을 유발했다. 이 사람에게는 정치운동이나 사회운동을 직접 하기에 맞지 않는 면도 없지 않으나 개인의 명예욕이나 지배욕이 아닌, 국가사회와 국민복지를 위한 포부와 성의가 있다면 그 뜻을 펴는데 협력해 국가사회를 이롭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오후에는 속초 영랑호를 구경했고, 밤에는 부인네들까지 포함한 일동이 회식을 하며 여흥을 즐겼다. 그 다음날은 정 회장 자신이 만든 20여명의 명단을 보이며 열흘쯤 후에 성북동 영빈관에서 모이자고 해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9월 어느날 저녁에 정 회장의 영빈관에서 만찬이 열렸다. 중국을 같이 다녀온 10여명과, 학계 언론계 실업계 문화예술계 인사 10여명 등 22명이었다. 그 날은 깊은 이야기 없이 그 모임을 계속하기로만 했다. 그리고 10여일 후인 21일 역시 그 영빈관에서 중국을 함께 다녀온 '천지회' 회원 약 70명이 모여 임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나서 하루 건너 또는 매일 정 회장이 계동 현대 회장실로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국민운동 계획을 세우라며 사람을 추천하라고 했다. 이수성(李壽成) 서울대교수, 이영희(李永熙) 인하대 교수, 평민당에서 나와 야인으로 있던 양순직(楊淳稙)씨, 김신일(金信一) 서울대 교수, 정근모(鄭根謨) 박사, 여자로서 황무임(黃戊姙)씨 등 몇 사람을 추천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정 회장과 무척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이 났고, 나한테 인사 청탁이나 사업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는 사람도 있어 당황한 적이 있다.
10월 어느날 정 회장이 김옥렬(金玉烈) 전 숙명여대 총장, 김신일 교수, 오제도 이용훈 변호사, 그리고 나 등을 청해 앞으로 운동을 어떤 형태와 내용으로 할 것인가를 논의하게 되었다. 오 변호사가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이 때는 이 변호사도 오씨에게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정당을 하려면 참으로 깨끗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서 해야 하는 데 지금 모인 사람만으로는 적합치 않다"고 반대했다. 그 무렵 정 회장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가 출판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성대한 출판기념회에서 내가 축사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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