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은 감정 컨트롤이 중요한 스포츠입니다. 또 많은 사람이 함께 달리기 때문에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하지요."26일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제1회 생명사랑 마라톤대회'를 개최하는 한국자살예방협회 이홍식(54·연세대 의대 정신과 교수) 회장은 마라톤대회를 여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12월 창립한 한국자살예방협회는 각종 자살예방 캠페인과 함께 자살 예방의 날(9월 중 예정)과 자살 예방 주간 제정 등 홍보 및 계몽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김수환 추기경과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 등이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회장은 "자살의 주 원인은 우울증, 의욕 상실 등 정신적인 문제인데 달리기나 걷기를 하면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미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는 마라톤대회가 자살예방 프로그램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경제 파산과 가정 해체 등으로 소중한 생명을 내던져야만 할 정도로 절박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생명 존중 정신을 함께 나누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번 대회를 기획했다고 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2년에 인구 10만 명당 8.1명이던 자살자가 2002년에는 18.1명으로 2배 이상 늘어나 헝가리(27.4명), 핀란드(21.2명), 일본(19.9명)에 이어 세계 4위의 자살국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10년 전 10위권 밖에서 맴돌던 우리나라 자살 사망률이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크게 늘어 달갑지 않은'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선 것이다.
자살은 매우 충동적 행위이어서 자살을 하려는 바로 그 순간만 넘기면 자살 의지가 꺾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자살을 실행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자살에 관해 말하거나 암시함으로써 도움을 받으려 하는데 이 순간에 도움을 주면 자살률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 회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살은 의지가 박약한 몇몇 극소수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로 인식됐지만 최근 들어 사회 저명인사의 잇따른 한강 투신과 인터넷 자살 사이트의 등장 등으로 자살이 마치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이유로 이제 국가가 나서서 자살 예방을 위한 관심과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적 차원의 자살예방 운동은 1986년 핀란드에서 최초로 시작돼 노르웨이, 스웨덴, 호주,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에서도 활성화되고 있다.
그는 이어 "현재 '생명의 전화' 등을 통해 개별·부분적으로 진행되는 자살 예방활동이 좀더 조직력을 갖춰나갈 필요가 있다"며 "그 일환으로 경찰청과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협조를 얻어 한강 다리 등 전국의 자살 빈발 지역에 자살 방지 표지를 세우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신병원=수용소, 환자=미친 놈'이란 잘못된 인식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는 2001년 3월 세브란스정신병원장에 취임하고 나서 가장 먼저 '정신병원'이란 명칭을 '정신건강병원'으로 바꾸었다.
개명한 이유에 대해 묻자, 이 원장은 "정신과에 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수치로 여기는 우리 문화를 감안해서"라며 웃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족 3대 중 한 명은 진지한 정신상담이 필요한 상황인데도 잘못된 인식 때문에 병원에 오는 것조차 꺼리는데, 이런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자살국가'의 오명을 벗는 것은 요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인식은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에도 알게 모르게 팽배해 있다. 그가 병원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 동료교수가 그를 보고 "어이, 정신병원장 축하하네"라는 인사를 건넸다. 기분이 상한 그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무안해진 동료교수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의사부터 편견을 고쳐야 일반인도 고치지"라며 나무랐다. 현재 이 병원의 모토가 '감성 진료'인 것도 이런 그의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쉽게 말해 환자를 '미친 놈'으로 보지 않겠다는 얘기다.
미국에서는 대통령까지도 정신과 전문의를 주치의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정신과 전문의가 중요한 회의에 배석해 고위 인사들의 심리상태를 점검하고 조언한다고 한다. 고위 인사들의 심리적 안전은 곧 국가의 안전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선진국의 사례에 부러움을 표하며 스트레스가 많은 정부 고위 관리와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 등 지도층일수록 정기적인 정신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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