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해서 더 웃겼던 '탄핵 드라마'가 끝났다. 국회에서 몸싸움을 하며 물건을 집어 던지고, 서로 육탄으로 저지하고, 소리지르고, 울부짖고, 꿇어 앉아 단체로 눈물을 흘리던 장면들은 아직도 우리들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CNN을 통해 전 세계인들이 다 함께 지켜본 활극의 현장이었다. 정통 활극을 보고 나면 시원해야 하는데 이 활극을 보면서는 부끄러웠다.탄핵 드라마는 '숫자'를 통해서 탄생했다. 다수의 의견이기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수의 의견인데 어쩔 거냐는 오만함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국회 내에서 '다수'라는 현상은 국민 여론의 '다수'와 일치하지 않았다. 국회의 '다수'들은 국민 여론이 탄핵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자 당황했다. 다수인 줄 알았는데 국회 밖으로 나가 보니까 '소수'였던 것이다. 그래서 탄핵을 철회하자, 하지 말자 하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탄핵을 보도하는 방송이 소수 의견을 무시한다면서 질타하기도 했다.
총선에서는 국민의 심판을 받아서 국회에서도 '소수'가 되었다. 헌재의 탄핵 심판이 발표된 후에는 '후폭풍'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과에 준하는 입장 표명을 해야 한다" "적법한 절차를 따른 정치적 행위였으므로 사과할 필요 없다" 등등 야당 내에서는 많은 말이 떠돌아 다녔다.
도대체 왜 탄핵을 밀어붙였는가? 처음에는 위협용이었는데 상황이 전개되면서 눈덩이처럼 그냥 굴러갔다고도 한다. 숫자에 대한 과신도 컸다. '다수'라는 믿음, 그 다수의 분모를 국회로만 생각했지 국민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위탁받은 권력이라고 보지 않고 당에서 나온 권력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숫자를 산술적으로만 봤을 때는 적법한 절차였다. 규칙은 지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대변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지는 못 했다. 그래서 장고 끝에 악수를 둔 격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다. 국민들의 참여로 뽑아주었고, 국민들의 참여로 존속되고 있다. 뽑아 주고 나서 지켜주기까지 했다. 탄핵 사실이 기정사실화되자 '노사모'는 5,000개의 계란을 삶아서 노 대통령의 부활을 상징했다. '노짱 부활'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노란 손수건'의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노란 리본을 곳곳에 달았다.
이번 탄핵 드라마를 보면서는 '숫자의 심리학'을 되새기게 된다. 다수와 소수가 존재할 때는 늘 긴장감이 감돈다. 헌재에서도 탄핵 심판에서 소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을 밝힐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하지 않았는가. 소수 의견이 밝혀지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되었기에 소수 의견을 밝히지 않기로 결정했다.
숫자의 심리학은 묘하다.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어이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탄핵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다수의 독재'라는 표현이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밀어붙일 때 다수의 독재가 된다. 다수의 폭거, 소수 의견의 존재, '다수'라는 믿음의 근거, 옳고 그름의 분별, '다수'가 '소수'로 추락했을 때의 심리변화는 다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분명한 것은 '다수'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이 다 존중받아야 한다. '다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국론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통합된 국론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다 하더라도 위험하다. 분열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최대공약수를 찾아 나가야 한다.
다수라고 밀어붙여서도 안 되고, 소수라고 잘못된 일에 침묵해서도 안된다. 내 편이 많은가 적은가보다는, 옳은 일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하다. 내 편이 많다고 자만할 일이 아니다. 이건 탄핵 드라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이제 거대 여당이 된 열린우리당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강미은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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