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14일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이 옥중에서 죽었다. 자살로 추정된다. 77세였다. 장칭은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한 달 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왕훙원(王洪文),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張春橋),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姚文元)과 함께 반당(反黨)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4인방(四人幇) 사건'이다.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는 이들 4인방이 마오쩌둥의 지시를 왜곡하고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모함하는 한편, 당과 군부를 장악해 최고지도권을 찬탈하려 했다고 발표했다.4인방에 대한 재판은 네 해 뒤인 1980년 11월에 시작돼 두 달 만에 마무리됐다. 장칭과 장춘차오에게는 사형이, 왕훙원에게는 무기징역이, 야오원위안에게는 징역 20년형이 선고되었다. 장칭과 장춘차오에 대한 사형 선고는 두 해 동안 집행이 보류되었다가 1981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4인방 사건은 마오쩌둥 치하에서 활개를 치던 문혁파(文革派)에 대한 이른바 실권파(實權派)의 반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체포로 10년간 중국 전역을 어지럽혔던 '문화 대혁명'이라는 이름의 극좌 소동이 막을 내렸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 박해를 받았던 덩샤오핑(鄧小平) 계보의 실용주의자들은 일단 당부주석 화궈펑(華國鋒)을 주석으로 밂으로써 그의 손을 빌려 4인방을 친 뒤, 그마저 밀어내고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체포 당시 장칭의 직위는 당 정치국 위원이었다. 그녀는 남편에 이어 당 주석이 되려는 야망을 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칭은 산둥성(山東省) 출신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샹하이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배우로 일하다가 공산당 활동에 뛰어들었고, 1939년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이 된 뒤 주로 문화 부문에서 본격적인 공적 삶을 시작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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