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무(梁承武·62) 한국유교학회장(중앙대 중어학과 교수)은 많은 저술을 통해 동양철학의 기반을 세운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학자'는 처음부터 꿈꾸던 길은 아니었다. 그는 공무원으로 일하다 인생 진로를 바꾸는 도전에 나섰고 갈등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방향타 역할을 해준 이가 모우종싼(牟宗三·1909∼95) 전 대만사범대 교수였다.1971년 양 회장은 지쳐 있었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한지 3년째였다. "나 혼자의 노력으로 정체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습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그러한 조직에 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스스로 깜짝 놀랐지요."
그는 사표를 던지고 유학을 준비했다. 대학시절의 전공인 동양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72년 그는 대만사범대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독신의 몸으로 전 재산을 털어넣고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후 10년간 양 회장은 이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현지 강단에도 서게 된다. 그는 대만에서의 10년을 인생에서 가장 값진 기간으로 기억한다. 모우조안 교수와 인연도 이때 맺어졌다.
중국 산동성 태생으로 베이징대 철학과를 나온 모우 교수는 중국 철학의 1인자로 꼽힌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에 자리를 잡았다. 모우 교수를 통해 그는 철학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
양 회장은 모우 교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철학이 과연 자신의 인생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갈등하고 있었다. 이때 모우 교수의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됐다. 모우 교수는 "철학의 목적은 덕성과 지혜의 함양이다. 덕성이란 인간됨을 말하고 지혜란 지식이다"고 말했다. 양 회장은 "모우 교수의 강의를 통해 철학을 공부하는 의미를 깨달았고 동양 철학이 현대 문명에 대한 대안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원전 연구에만 매몰돼 온 기존의 학계 풍토를 벗어나 현실에 적용 가능한 동양 철학을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회고한다.
무엇보다 양 회장은 모우 교수가 지행일치를 실천하는 것을 보면서 감화를 받았다. 모우 교수는 학자로서 성공했고 인세 수입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모우 교수님의 집에 자주 들렀는데, 비싼 음식을 먹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산동성의 특산 음식인 만두를 사다 먹을 정도였습니다."
모우 교수는 95년 사망하면서 재산의 상당액을 학술단체에 기부했다. 자신의 두 아들에게는 생활에 불편이 없을 정도의 재산만 남겼다. 모우 교수가 이 같은 소박한 삶을 살게 된 것은 항일전쟁, 국공내전 등 중국 격변기의 혼란을 몸소 겪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모우 교수는 80년 한차례 한국을 방문해 강연회를 갖기도 했다. 양 회장은 이때 모우 교수의 안내를 맡았다. 양 회장은 95년 모우 교수의 장례식에 장례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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