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과 나의 잊지 못할 추억을 적어보겠다.현대에서 경부고속도로공사를 맡아 진행할 당시 청소년단체협의회 대표들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가 점퍼차림으로 노동 현장을 지휘하는 것을 보고 남다른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 뒤 중동진출, 서산농장 건설 등을 보며 호감을 가졌었다. 그를 '한모음회'와 '도산기념사업회' 조찬 모임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신의 인생철학, 성공담, 시국관을 들려주었는데, 소문난 변설가들이 몇 시간에 걸쳐 할 것을 10∼20분에 잘 요약했고, 질문에 대한 대답도 알기 쉽고 분명하게 피력했던 기억이 난다.
KBS사장 시절인 1989년 가을 어느날 성북동 현대 영빈관으로 나를 초청해 본부장들과 함께 간 적이 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정 회장이 노래를 부르자고 하며 먼저'인생은 나그네길'을 3절까지 불렀고, 모두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보냈다. KBS가 동아일보와 함께 러시아 볼쇼이 오페라단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김상만(金相萬) 동아일보 회장이 자택으로 오페라단 지휘부와 나, 정 회장 등을 초대했다. 러시아 역사와 문학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데 정 회장이 자신은 노동자대표라고 하면서 유머러스하게 분위기를 잡아가며 화제에 어울리는 말솜씨를 과시하는데 놀랬다.
한중국교 정상화 전인 1991년 7월초 정 회장과 함께 백두산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정 회장이 70명 가량의 사회 명사들을 모아 '한중민간경제협력사절단'이란 이름으로 갔는데, 실제 경제인은 몇 사람 없었다. 원로로는 문창모(文昌模) 박사, 홍남순(洪南淳) 변호사, 학술원 회원 최호진(崔虎鎭)씨 등이 있었고, 경제인으로는 유기정(柳琦諪) 박성산(朴聖山) 김상홍(金相鴻)씨, 군 출신으로 윤성민(尹誠敏) 채명신(蔡命新)씨, 교수로는 김종서(金宗西) 안병욱(安秉煜) 한완상(韓完相) 장을병(張乙炳) 이한빈(李漢彬)씨와 박홍(朴弘) 서강대 총장, 여성으로는 정의숙(鄭義淑) 이화여대 총장과 이동원(李東媛) 백명희(白明姬) 신낙균(申樂均)씨, 작가 박범신(朴範信)씨, 영화감독 이장호(李長湖)씨, 고흥문(高興門) 허화평(許和平)씨, 정 회장의 고문변호사인 오제도(吳制道) 이용훈(李龍薰)씨 등이었다.
베이징(北京)을 거쳐 백두산 관광을 하게 됐다. 정 회장은 비행기나 버스로 가고 오는 도중에도 이사람 저 사람과 대화를 하고 노래도 같이 부르도록 하는 것이 친화력이 대단했다. 백두산 정상에 가까운 주차장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는데, 그때 77세였던 정 회장이 가장 선두에 서서 씽씽 올라갔다.
하루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치우자화(鄒家華) 부총리 주최로 환영 만찬이 있었다. 치우 부총리가 경제각료들을 배석시키고 2시간에 걸쳐 제8차 5개년 계획을 설명했다. 정 회장이 답사를 하는데 "중국이 개방을 더 하고 한중 국교도 정상화하라, 그러면 많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정 회장은 "이번에 톈진(天津)의 자동차공장을 가보니 1년에 4만대 생산한다는데 직공 2만명이다. 나는 1년에 100만대 생산하는데 4만 명이다. 기술의 문제니 도와주겠다"고 치우 부총리를 가르치는 듯이 말했다. 자신만만했다.
떠나오기 전날 새벽 5시쯤 호텔의 내 방으로 정 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상의할 일이 있으니 자기 방으로 오라고 했다. 그의 방으로 갔더니 "우리가 민족의 성지를 왔다 가는데 이 좋은 인연을 살리기 위해 학교 동창회처럼 모임을 만들자"면서 나보고 그 취지를 일행에게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천지회'(天池會)라는 이름까지 짓고 저녁 만찬에서 취지를 설명했다. 모두 좋다고 하는데,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용훈 변호사가 "서 선생, 정 회장이 이런 모임을 만드는 속뜻을 아십니까. 저 양반이 정당을 하려고 합니다"하는 것이었다. 모두를 술이 좀 된 뒤 이 변호사가 정 회장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당신, 정당 하려고 그러지"하니 정 회장은 "아 이 사람이 술 취했군"하고 말을 돌렸다. 그렇게 1주일 동안 중국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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