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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서안화차' 박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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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서안화차' 박지일

입력
2004.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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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란 절반은 부끄럼이요, 절반은 영광이다. 자기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 느끼는 부끄러움, 그리고 자신을 잊어버릴 때 오는 영광."세기의 명배우 존 길거드가 남긴 이 말은 박지일(43)에게 잘 들어 맞는다. 멋쩍은 첫 인사를 나눌 때, 그는 부끄러워했다. 작년 주요 연극상을 휩쓴 연극 '서안화차(西安火車)'(작·연출 한태숙)의 연습장으로 들어서자, 그는 어느새 중국 시안의 진시황릉을 향한 기차 안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소심함 속에 흉기 같은 난폭함을 숨긴 채, 유약한 표정 뒤로 광기를 가린 채, 극중 인물 안상곤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올해도 사람을 몇 죽였다. 세금은 올해도 못 냈다'." 이상하게 박지일은 출세작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때부터 계속 누군가를 죽이는 역을 했다. 섬세하면서도 지적인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살인자'였다. 이번엔 조각을 좋아하는 동성애 기질의 호텔 직원 상곤이 그의 역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 받은 상처를 이겨내고 싶어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처음엔 힘들었죠. 중학교 때 남자친구에게 굉장한 친밀감을 느꼈던 기억을 떠올렸어요. 그건 동성애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었는데, 상대역(이명호)과의 마지막 장면은 연극적 에너지를 다 쏟아내야 합니다."

차분한 말투 속에 고향인 부산 앞바다의 바다 냄새, 항구에 사는 억센 사내 기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마골 극장서 이윤택 선생께 안 맞은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웃음). 여러 모로 제가 유연해서 그런 것 같아요."

연극반 선배의 꼬드김으로 연극과 고시공부를 병행하다가, 고시반 지도교수에게 쫓겨난 게 연극 입문 계기다. 연극을 하면서도 '이게 과연 내 길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분식점 운영, 칼국수 배달, 유통회사 사원, 프랑스 유학 등 외도를 하며 들락날락거렸다. "연극을 안 하는 인생은 비어 있는 인생"이란 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폭발할 듯한 열정을 절제된 지적 연기로 보여주며 각광을 받은 데는, 이런 방황이 적지 않은 힘이 됐을 것이다.

지적인 연기자로 '오해' 받는 게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즐겨 부른 팝송 실력이 계기가 되어 'Sealed with a Kiss' 한 곡으로 최근 뮤지컬 '맘마미아' 오디션을 통과해 주역을 맡기도 했다. "'쌈마이(?)'로 놀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거죠. 그렇다고 그런 역이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9월에 올리는 '바다와 양산'에서 웃기는 하숙집 아저씨로 나오는데 그런 작품을 하면 즐거워져요. 심각한 작품 전문배우로만 나오기보다 다양하게 하고 싶죠."

그러나 어쩌랴. '서안화차'로 13일부터 30일까지 정미소극장에서 그는 또 매일 살인을 저질러야 하고, 겨울에 재공연할 '보이체크'에선 아내를 죽여야 한다. 배우로서 그가 얻은 영광은 결국 고뇌하는 지식인 살인자가 아닌가.

/이종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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