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호(號)에 사공이 너무 많다.'총선 후 국정주도권이 당으로 쏠리고, 이정우 대통령 정책기획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부쩍 목청을 높이면서 경제의 중심 축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총선 전까지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도 최근 당과 청와대의 틈바구니에서 정책 조정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 리더십 실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선장이 낮잠을 자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던 참여정부 1기 경제팀의 실패를 답습할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우선 총선 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경제정책의 무게중심이 정부에서 여당으로 이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당의 정세균 전 정책위의장은 최근 이 부총리에게 "당의 입장(개혁)을 반영해달라"고 압박했고, 11일 당선된 천정배 원내대표도 기자회견에서 "과거처럼 당이 청와대나 정부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문화는 시급하게 극복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김근태(원내대표)-정세균(정책위의장)' 라인의 바통을 이어받은 '천정배-홍재형' 라인의 정책 방향도 아직까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천 대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개혁'을 외치는 개혁세력의 대표주자인 반면 김영삼 정부 시절 경제부총리를 지낸 홍 의장은 온건 보수파. 두 사람의 조합은 마치 자동차(우리당)가 오른쪽(홍 의장)으로 가면서도 끊임없이 왼쪽(천 대표) 깜박이를 켜놓고 있는 것과 같다는 평이다. 홍 의장이 '성장 우선론'에 가세하면서 이 부총리가 힘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섣부른 관측도 나오고 있지만, 그는 12일 열린 당정협의에서 "정부가 (경제상황에) 너무 낙관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질타하며 '시어머니' 역할을 톡톡히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재경부와 당이 성장과 개혁 사이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이정우 위원장을 필두로 김대환 노동부 장관,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 정부내 개혁파는 한층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위원장은 지난달 우리당 워크숍에서 "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국민들이 개혁을 계속해 달라고 주문한 것"이라고 포문을 연 뒤, 이달 11일 경북대 강연에서 "일시적 경기부양과 몇 발짝 못 가 발병 나는 성장은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출자총액규제 등 재벌정책 강도를 놓고 재경부와 공정위가 힘겨루기를 하자 "공정위원장이 맞다"고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김 장관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강 위원장은 재벌계열 금융회사의 의결권 축소와 금융계열분리청구제 도입 등을 밀어붙이고, 이 부위원장은 재벌계 생명보험사를 '도둑'으로 몰며 개혁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강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이 부총리는 점차 '소수'로 내몰리며 혼돈에 빠진 시장심리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있다. 금융계 관계자는 "분배보다 성장을 우선시하는 이 부총리의 주장이 맞더라도 당·정·청(黨·政·靑)간 중구난방식 소란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경제의 앞길은 캄캄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與 원내사령탑·政 경제사령탑 상견례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와 홍재형 정책위 의장은 12일 오전 이헌재 경제부총리 등 재경부 관계자들을 만나 경제위기대책을 협의하는 것으로 취임 후 공식활동을 시작했다. 이날 정책정례회의는 여당 원내사령탑과 정부 경제사령탑이 상견례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측은 첫 만남에서부터 시각차를 노정했다. YS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를 지낸 홍 의장은 "정부 상황인식이 안이하다"고 단정했다. 반면 이 부총리는 당측의 개혁우선성향을 의식한 듯, 성장우선정책의 필요성을 우회적으로 강조했다. 홍 의장은 재경부의 수출여건 보고를 받고 "경제지표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체감경기는 상당히 좋지 않다"며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에 이 부총리는 "경제는 '심리'인데 정부도 말 못할 사정이 있다"며 "경제가 자꾸 나쁘다고 하면 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받았다.
이에 앞서 이 부총리는 "합리적인 개혁을 추진해 경제시스템이 시장원리에 따라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며 "장기적으로 폭 넓은 성장이 가능하도록 해서 모든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달래 듯 당부하기도 했다. 재경부측은 또 "탄핵 정국에서 22개의 민생법안이 처리되지 못한 만큼 후유증이 다가올 것"이라며 "조속한 법안처리를 당이 도와달라"고 주문했다.
천 대표는 이날 의견을 개진하기 보다는 재경부측 설명을 경청했다. 그는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노력하겠다"며 "우리는 한 배를 타고 있으니 정부측과 긴밀하게 머리를 맞대고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해 당정간의 조화를 강조했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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