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 1990년 2월초 감사원에서 감사를 나왔다. 그런데 연말에 특근비를 준 것을 트집잡았다. 부장 몇 명의 사표를 받아야 겠고, 조사를 더해야 겠다고 했다. 최병렬(崔秉烈) 문공부 장관에게 물어보았더니 "감사 보고가 걱정스럽다. 노조한테 압력을 받아서 노조가 달라는 대로 줬고, 근거 없이 줬다. 여러 관계기관에서 다 안다"고 했다. 며칠 후 다시 감사를 나왔다. 이번에는 부사장까지 징계하고 국장과 부장들의 사표를 받아야겠다고 말했다. 일부 특근을 하지 않은 사원들을 특근한 것으로 만들었으니 공문서를 위조했다는 것이었다. 3,000여만 원은 회수하라고도 했다. 또 그 돈의 일부가 언론노련으로 가 노조 투쟁기금으로 사용됐다고 문제 삼았다. 알아보니 얼마동안 노조원들이 조합비를 내지 않아 밀렸던 것을 이번에 한꺼번에 냈는데 특근비의 10% 가량이 여기에 사용됐다는 것이었다.나는 그런 것은 몰랐고, 특근비도 인센티브로 주기로 이사회에서 결의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안기부와 문공부, 그 밖의 여러 기관에서 단단히 처벌해야 한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때 내 생각으로는 MBC와 KBS가 과거처럼 정부에 협조적이 아니었고 시시비비를 가리며 독자행보를 취했기 때문에 문공부가 주도해 방송을 장악하려고 벌인 일이었다. 청와대도 선거를 앞두고 방송을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
나는 임·직원 징계와 특근비 회수를 거부했다. 정부의 움직임은 사장을 그만두게 하려는 압력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임하기로 했다. 이사회에 사표를 냈더니 이튿날 노정팔(盧正八) 이사장이 사표를 반려하겠다고 가져왔다. 나는 "정부에서 내가 그만두기를 바라는데 연극하지 마시오"라고 하고 돌려줬다. 미련을 갖고 그 자리에 더 있으면 그 전처럼 정부 말만 듣게 되거나, 아니면 노조 편만 들어야 하는 형국이었다. 더 이상 사장 자리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튿날부터 출근하지 않았다. 88년 12월 초에 취임해 90년 3월에 그만 뒀으니 3년 임기의 절반도 못 채운 것이다.
그러자 본부장들까지 전 직원이 정부가 민주방송을 탄압한다며 사장 퇴진 반대 데모를 했다. 노조원들은 더욱 거세게 광화문까지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노태우(盧泰愚) 정부 하에서 열린 첫 시위였다. 이 또한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으나 연일 시위가 계속돼 한 달쯤 이어졌다.
며칠 후 강영훈(姜英勳) 총리와 홍성철(洪性澈) 대통령 비서실장이 나를 좀 보자고 해 총리공관에서 점심을 했다. 홍 실장은 "서 사장, 이 일이 잘 수습되면 노 대통령이 중요한 것을 맡기려고 한다"고 했지만 나는 "천만에, 방송사에서 나를 뽑아서 KBS 사장을 했지, 나는 관록을 먹을 사람이 아니오"라고 했다. 홍 실장은 "이렇게 된 것을 며칠 전에야 알았다"고 미안해 하면서 "후임 사장을 누구로 해야 수습이 잘 되겠나"라고 물었다. 나는 전에도 물망에 올랐던 이한빈(李漢彬) 전 부총리나 이원경(李源璟) 전 주일대사를 추천했다.
그러나 홍 실장의 말이 최병렬 문공부 장관이 서울신문 사장으로 있던 서기원(徐基源)씨를 보내려고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서울신문에서 배달원들에게 특혜를 주면서 농성하는 노조원을 끌어낸 일을 알고 있었기에 "서씨를 보내면 KBS 사태는 수습이 안되고 노 대통령이 큰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총리나 비서실장이 최 장관의 뜻을 돌릴 수 없냐"고 했더니 두 사람은 "최 장관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 말이 먹혀 들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서씨가 KBS 사장으로 갔다.
그 때 김근태(金槿泰)씨 같은 이들은 왜 정부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 투쟁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나는 더 남아 있어봐야 소신대로 역할을 하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으로 물러났다. 나는 KBS 사장을 지냈다는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KBS의 위상을 많이 바로잡았고, 본부장들 이하 사원들과도 친화 단결하여 짧았지만 열심히 일했다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