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수목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한 장면. 뉴욕발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검은 셔츠를 입은 말쑥한 차림의 지훈(이현우)에게 초면인 승리(변정수)가 대뜸 묻는다. "저기요, 저 아시죠? 모르세요? 어휴 아실 텐데. 저기 혹시 소호에 있는 키친 앤 바에 자주 가시지 않았어요?" '남여상열지사'를 위한 뻔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건 남자가 맘에 드는 여자를 향해 '작업'에 들어갈 때 쓰는 상투 어구가 스스럼없이 승리 즉 여자의 입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방송사 기자인 신영(명세빈)은 첫 사랑인 초등학교 동창을 향해 "신준호 딱 걸렸어"를 외치며 작업에 들어간다. 준호가 다니는 요가 학원에 등록하고 일부러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그의 집을 방문해 노골적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수시로 전화를 걸어 "밥 먹자, 영화 보자"고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도 신영의 몫. 친구인 승리는 그런 신영을 열심히 코치한다. "와인을 함께 먹어 분위기 잡고, 그 다음엔 키스까지 가는 거야."
이쯤하면 "이브가 자신의 사랑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에서 남성에게 사랑받고 선택받아야 할 객체이자 대상으로만 묘사됐던 여성이 당당하게 스스로 남성을 선택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명제에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뒤따를 지 모른다. "세상 모든 드라마가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간 여자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가 좀 많았나? 여성 우위가 점쳐지는 21세기 현실을 반영한 당연한 결과다."
'여자가 말하는 사랑 이야기'가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여성의 모습은 그간 드라마에서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됐다. 사랑의 대상으로만 존재해야 할 숙명을 거부한 순간부터, 여성의 모습은 악녀이거나 운명적 사랑을 가로막는 방해꾼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1960∼70년대 드라마 이야기가 아니다. 2월 종영한 SBS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도 그런 여성은 등장했다. '송주 오빠'(권상우)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라이벌 '정서'(최지우)를 향해 차로 돌진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수시로 음모를 꾸미는 광적인 캐릭터 '유리'(김태희)를 만들어 냈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실명 위기에 놓인 정서에게 "이런 꼴로 송주 오빠 발목 잡고 싶니?"라는 대사를 내뱉는 유리는 그간 드라마가 그린 여성상의 전형 중 하나였다.
남성의 사랑을 받는 수동적 존재로 규정된 여성에게는 남성의 사랑을 받느냐 아니면 사랑을 독차지한 상대 여성을 질투하며 복수의 칼날을 가느냐 두 가지 선택만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TV 드라마는 이와 질적으로 다른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울고 질투하는 대신 수시로 사랑해줄 남성을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인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와 같은 시간대에 방영되며 앞 치락 뒤 치락 시청률 싸움을 하는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도 그렇다.
우경(김성령)은 영훈(박건형)을 철저하게 지배하는데 그 이유가 물려받은 돈이 많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루 앞둔 영훈에게 "그 여자랑 결혼하지 말아요"라고 요구하면서 남자가 천문 관측을 할 수 있는 수십억 짜리 빌라를 선물하겠다고 말한다.
결혼식 당일 신랑을 도둑 맞은 은재(김현주)의 반응도 기존 드라마와 딴판이다. 은재는 '재벌집 아들의 사랑을 통해 구원받고, 배신한 남자는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는' 상투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돈을 벌어 영훈을 되찾겠다"고 공언한다. 우경의 사랑과 은재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선택을 요구받는 타자는 다름 아닌 영훈 바로 남성이다. '돈 많은 경쟁자에게 여자를 뺏기지만 이를 갈며 성공해 배신에 대한 쓰라린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남성 판타지는 여성에게 그 주연 자리를 내준 것일까.
MBC 드라마 '불새'도 이와 비슷한 징후를 보여준다. '불새'는 '오렌지족이 풋사랑에 빠져 상대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만 서로의 환경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가난한 연인을 버린다'는 이야기로 출발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지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바꿨다. 드라마 첫 회에서 지은(이은주)은 세훈(이서진)을 스포츠카에 태우고 자신의 별장으로 거침없이 달린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지은과 세훈의 경제적 상황이 역전되고 사랑의 주도권이 세훈에게 넘어가지만 '러브 스토리'의 출발점은 분명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 속 '이브의 해방'을 이야기할 단계는 아직 아닌 것 같다. 이들 드라마에는 여성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왕자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는 야근을 하는 신영을 위해 도시락까지 챙기는 종합병원 원장 아들이, '불새'에는 재벌집 아들로 '사랑 밖에 모르는' 정민(에릭)이 있다. 이브가 사랑은 열심히 찾고 있지만 완전히 해방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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