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7년 5월13일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빈에서 태어났다. 1780년 같은 도시에서 몰(沒).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이 없었던 아버지 카를6세의 뒤를 이어 1740년 오스트리아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겸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독일제국) 황제 자리는 물려받을 수 없었다. 선제후들이 뽑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오로지 남성의 몫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오스트리아 황제로 인정 받는 데도 우여곡절을 거쳤다. 아버지 카를6세가 1713년에 반포한 국본조칙(國本詔勅,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여성의 왕위계승을 허용하는 합스부르크가 가헌)을 주변 국가들이 이미 승인한 상태였는데도, 막상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위에 오르자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베르트(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7세)가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의 오스트리아 제위 계승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개입한 8년간의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끝에야 오스트리아 제위를 확고히 움켜쥘 수 있었다. 그녀는 전쟁 중이던 1745년 숙적 카를7세가 죽자,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넘겨주는 대가로 남편 프란츠슈테판을 신성로마제국의 새 황제(프란츠1세)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혼자서, 그리고 1765년 이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오른 아들 요제프2세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봉건적 관습·제도들을 씻어내며 근대적 법치국가의 바탕을 만들었다. 그녀가 집권 초기에 완공시켜 즐겨 머물렀던 쇤브룬 궁전은 그 아름다움과 위엄으로 지금도 그 시기의 활력을 증언하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 속의 유럽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모든 것을 상징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자녀가 16명이나 있었다. 프랑스 왕 루이16세의 비(妃)로 프랑스 혁명 중에 단두대에서 죽은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녀의 딸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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