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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장 선도하는 글로벌 리더]<1> 이기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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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장 선도하는 글로벌 리더]<1> 이기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사장

입력
2004.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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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 부진과 투자 위축에 이어 최근 고유가 사태와 금융 불안까지 겹쳐 흔들리는 한국 경제에 희망의 빛은 없을까.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역은 기업이다. 최근 사라져가는 기업가 정신의 회복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불굴의 의지와 도전 정신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업은 물론,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온 각 분야 최고경영자(CEO)들의 삶과 경영철학 등을 시리즈로 심층 분석해본다. /편집자주

이기태(55)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은 누가 뭐래도 애니콜 신화의 주역이다. 한국의 국가대표 상품인 애니콜은 이 사장이 없었다면 빛을 발하기 힘들었다. 그는 지구촌 명품인 삼성 휴대폰의 전략을 '세계 최초와 세계 최고(World First & World Best)'로 요약한다.

휴대폰 얘기만 나오면 열변을 토하는 이 사장은 정보통신에 관한 한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일본의 정밀도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지만 로직(논리)이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사정이 다르다고 했다. 한글 창제에서 보듯 한국 사람은 매우 논리적이기 때문에 디지털에 강하다는 설명이다.

TV보다 라디오를 택한 남자

이 사장은 1973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정확히는 삼성-산요라는 합작 회사로 TV와 라디오를 생산했다. 당시 인재들은 TV 부문의 기획·개발실 또는 구매 부서를 선호했다. 그는 그러나 라디오 파트의 현장 직을 택했다. 인하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육군 통신학교에서 장교로 복무한 그는 통신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듬해에는 수원 공장 전체의 생산 책임을 맡았다. 나이 많은 기술자와 일본 연수를 다녀온 고참 직원들도 적지 않았다. 그는 "통신학교 교관 시절 익힌 통솔력이 큰 도움이 됐다"며 "소리 나는 부분은 잠재우고 잘 따라오는 부분은 격려해 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삼성-산요는 삼성전자로 통합됐고 80년대 들어 컬러 TV가 등장하면서 라디오는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무선통신의 장래를 믿고 한눈 팔지 않은 채 묵묵히 일했다.

휴대폰과의 운명적 만남

비디오 생산부장 등을 거친 이 사장은 89년 1월 정보통신사업 담당 이사를 맡으면서 휴대폰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이 때부터 기적에 가까운 애니콜 신화를 총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이 된 셈이다.

가볍고 튼튼하면서도 깜짝 놀랄 만한 디자인 등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진짜 멋진 휴대폰은 그의 머리 속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한방에 속 시원하게 터지는 편리함과 유선 전화보다 깨끗한 통화 품질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마케팅 보다 기술개발이 중요

이 사장은 실적 점검을 위한 임원 회의를 주재해본 적이 없다. 시장에서 세계 1위니, 2위니 하는 양적 경쟁보다 어떤 기술로 무장한 휴대폰이 시장을 휩쓸 지가 최대 관심사다. 그의 뚝심과 경영에 대한 감(感)을 보여주는 일화도 많다. 휴대폰 수출이 활기를 띠던 2002년 봄 이건희 회장이 "이번 기회에 좀더 공격적으로 마케팅에 나서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그러나 '그럴 필요 없다'고 답했다. 무리하게 시장 점유율을 높이다 보면 광고비에 출혈경쟁이 겹쳐 수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의 감은 적중했다. 마케팅 보다 기술을 앞세운 고가 전략으로 애니콜은 그해 말 세계시장 점유율이 8%에서 10%대로 높아졌고 영업 이익률도 30%대를 기록했다.

이 사장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PC가 모든 기기의 허브가 된다고 믿었지만 나는 노(No)라고 했다"며 "조만간 단말기 하나로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이를 위해 휴대폰 하나로 신용카드와 방송수신·캠코더·신분증 등의 기능이 모두 가능한 올인원(All―in―One) 단말기를 개발할 작정이다. 그는 "그 때가 되면 휴대폰 시장 점유율 세계 3위인 삼성전자는 리딩기업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수기자 jslee@hk.co.kr

■가슴 따뜻한 불도저 사나이

이기태 사장은 '삼성 맨'의 풍채는 아니다. 평범한 학벌에 우직한 외모, 눌변의 그는 처음부터 주목받는 스타급 인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삼성전자 입사 동기들에 비해 진급도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실함은 경영진은 물론 동료 선·후배들의 신뢰를 쌓기에 충분했다. 한번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옳다고 믿는 건 세상 없어도 양보하지 않는 뚝심 때문에 '불도저'와 '카리스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가슴에는 항상 따스함을 품고 사는 사나이로 통한다. 입이 무거운 이건희 회장도 그룹 사장단 회의 등에서 그에게 자주 말을 건네는 등 남다른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진실함이 배어 있고 박력이 넘친다. 스스로 '촌놈'이라고 말하는 그는 31년 동안 오로지 통신 외길을 걸어왔다.

정보통신의 미래를 내다보는 그의 통찰력은 정보기술(IT)에 밝지 않은 이들에게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실제 그가 선택한 제품은 모두 성공했고, 노(No)한 제품은 하나같이 실패를 맛봤다. 그는 '정확한 베팅'의 비결을 묻자 제품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굳이 꼽자면 IT 산업의 흐름을 주시하고 고객 입장에서 제품을 개발하려는 자세 덕분이라고 했다.

스톡 옵션(주식매입선택권)으로 대박을 터뜨린 그는 정작 자신의 연봉이 얼마인지 모른다.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돈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불우 이웃이나 청소년 돕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부인 고복숙(52)씨도 남에게 베푸는 데 열성적이다. 자신은 2만∼3만원대 옷을 사 입으면서도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돕느라 한 달에 수백만원을 쓸 정도다. /이종수기자

■"10년전 불량제품 화형식 애니콜 신화 밑거름 됐죠"

"잿더미에서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애니콜이 월드 베스트로 꽃피기 까지는 숱한 곡절이 있었다. 이기태 사장은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벌어진 '불량 제품 화형식'을 평생 잊지 못할 '사건'으로 꼽는다.

2,000명의 임직원이 지켜 보는 앞에서 비장한 표정의 현장 근로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핸드폰과 무선전화기 등을 해머로 내리치자 15만대의 제품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돈으로 따지면 500억원이 연기와 함께 사라진 셈이다. 이 사장은 "내 혼과 정성이 담긴 제품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도저가 잿더미를 짓밟는 순간 결연함이 생겨났다"고 회고했다.

이날 화형식은 질(質) 경영을 강조한 이건희 회장의 의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 회장은 그 해 설날 휴대폰 등 2,000대를 임직원들에게 선물로 돌렸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통화가 안된다', '속았다'는 비아냥만 돌아왔다. 이 회장은 "고객이 두렵지도 않냐"며 불같이 화를 낸 뒤 "시중에 나간 제품을 모두 걷어들여 공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 버리라"고 지시했다.

당시 무선데이터사업본부 이사였던 이 사장은 직접 모토로라를 방문, 제품을 일일이 뜯어보는 등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기술자들도 밤새 공부하며 토의하고 주말이면 대학 교수를 초청해 강의를 듣는 등 공장 전체가 연구소와 다름 없었다"고 말했다.

화형식 이후 8년 만인 2003년 6월 이건희 회장이 주재한 신경영 10주년 기념 사장단 회의에서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93년 신경영 선언 당시의 영상이 나오고 사장단이 감회에 젖어 들 무렵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난 휴대폰의 성장사와 이기태 사장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한 참석자는 "애니콜은 10주년 기념 영상물에 제품으로는 유일하게 등장했다"며 "애니콜은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이기태 사장 약력

1948년 대전출생

1967년 보문고등학교 졸업

1971년 인하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1973년 삼성전자 입사

1985년 삼성전자 비디오생산부장

1991년 삼성전자 팩스 사업부 이사보

1996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장(상무)

2000년 삼성전자 정보통신 총괄 부사장

2001년 삼성전자 정보통신 총괄 사장

2001년 휴대폰 산업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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