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잭 스나이더 감독의 공포물 '새벽의 저주(Dawn Of The Dead)'가 그렇다. 공포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국내 비디오 출시명 '이블 헌터', 1979년)을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오락성에서 원작을 압도한다.
내용은 결말을 제외하고 원작과 똑같다.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이웃집 소녀가 느닷없이 뛰어들어와 자고 있는 사람을 물어 뜯는다. 몽둥이로 후려쳐도 소녀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소녀는 이른바 살아있는 시체, '좀비'였다.
좀비는 시체인데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돌아다니며 사람을 잡아먹는다. 좀비에게 물리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좀비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좀비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끝없이 늘어난다.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머리를 공격하는 것. 약점을 알아낸 사람들이 일치 단결해 공격에 나선다. 이때부터 좀비에게 포위된 성처럼, 소수 생존자들이 갇혀있는 쇼핑몰이 마지막 보루가 된다.
원작자인 조지 로메로 감독은 약 20년에 걸쳐 좀비 3부작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68년), '시체들의 새벽'(79년), '시체들의 오후'(85년)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탐욕스런 소비문화를 비판했다. 끝없이 사람을 잡아 먹어도 식욕이 채워지지 않는 좀비는 결국 욕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그의 비판적인 시선은 선악의 이분법적 논리로 봤을 때, 선한 편에 속한 사람마저도 비틀어 놓았다.
좀비에 쫓겨 쇼핑몰로 숨어든 사람들은 주인 없는 상점을 약탈하며 위기의 순간에서도 욕심을 채우기에 바쁘다. 또 총을 들고 쇼핑몰을 배회하는 좀비들을 벌레 잡듯 해치우며 살육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막판에는 좀비를 제쳐두고 약탈자로 변해버린 폭주족과 쇼핑몰을 점거한 사람들 사이에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꼴사나운 싸움이 벌어진다. 결국 인간의 적은 좀비가 아닌 인간이었다. 로메로 감독은 좀비 3부작을 통해 좀비 보다도 추악한 사람의 내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이같은 원작의 의미를 강도높은 영상으로 극대화시켰다. 아카데미 특수분장상을 2번이나 받은 데이비드 앤더슨이 만들어낸 피부가 너덜거리고 뼈가 드러난 좀비들은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흉측하다. 사람들을 물어뜯기 위해 떼지어 달려드는 좀비 무리와 위기의 순간에서 아슬아슬하게 총을 발사해 좀비의 머리와 사지를 날려버리는 통쾌한 장면은 관객을 숨 돌릴 틈 없는 긴장의 연속으로 몰아넣으며 아드레날린 수치를 치솟게 만든다.
이와 함께 생존자의 심리적 갈등을 다룬 원작의 기름 끼를 빠른 장면을 통해 빼버렸다. 뮤직 비디오와 비디오 게임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이같은 심리묘사가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 공포보다는 롤러코스터 같은 긴장과 재미에 초점을 맞춘 요즘 할리우드 공포물의 경향을 제대로 보여준 수작.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도 자리를 뜨지 말 것.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원작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막판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18세관람가. 14일 개봉.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 좀비영화의 역사
좀비는 카리브해 연안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흑인들이 믿는 부두교에서 유래됐다. 부두교 사제가 시체에 저주를 걸면, 세상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는 것.
좀비영화의 시초는 1932년 빅터 하플링 감독이 '드라큐라' 역으로 유명한 벨라 루고시를 주연으로 기용해 만든 '화이트 좀비'(사진)였다. 당시 작품 속의 좀비는 요즘 공포물과 달리 영혼을 상실한 채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불쌍한 존재였다. 그래서 노예반란을 떠올리는 좀비들의 공격도 수긍이 갔다.
지금처럼 썩어 들어가는 피부와 뼈가 드러난 끔찍한 몰골의 좀비는 존 길링 감독의 '좀비의 역병'(1966년)에서 등장했다. 부두교의 마법에 걸려 되살아난 시체인 좀비는 죄책감 없이 해치워도 되는 악의 화신이었다. 이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년)에서 대량 번식과 대량소비를 상징하듯, 떼지어 사람을 공격하는 좀비집단이 탄생했다. 이후 이어진 좀비 3부작은 좀비영화의 형식를 고착시켰다.
/최연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