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고객이 한 특허사무소에 갈 일이 있어 어떻게 가는지를 문의하려고 전화를 했다. "처음 가는데 사무소 위치를 알려주세요." "2호선 강남역에서 4번 출구쪽 A예식장 방향으로 가다가 사거리 나오면 특허청 방향으로 꺾어져 조금 내려오세요." "제가 A예식장을 잘 모르거든요. A예식장이 강남역에서 동쪽인가요?" "동쪽인지 서쪽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고, 고객님은 A예식장도 모르세요?" "…."이 직원은 고객이 서울의 주요 건물을 잘 아는 것으로 매우 위험한 가정을 하고 있다. 이 때 직원이 다음과 같이 대답해 준다면 어떨까? "강남역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가다 처음 사거리 나오면 남쪽으로 50m 가면 됩니다." 이 얼마나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가!
우리는 사용하면 너무나 편리할 동서남북을 실생활에서 놀라울 정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보통 사람들이 동서남북을 평소 인식하고 있다는 가정이 맞지는 않겠으나 서울의 주요 건물을 모두 아는 것과 동서남북을 인식하는 것 중 무엇이 비용이 큰지는 분명하다.
지축역에서 대화역을 잇는 지하철 3호선의 예를 들어 보자. 충무로역에서 안국역을 가려면 대화역 방향을 찾아서 가야 한다. 이 때 3호선 지하철의 양쪽 끝 역을 평소에 기억하지 않고 대화역이 안국역 쪽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면 제대로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다. '3호선 대화역 방향' 대신에 '3호선 북쪽 방향'이라고 표시하는 것이 훨씬 명확할 것이다. 만일 3호선이 신축 연장되어 새로운 끝 역이 생기면 사람들은 새로운 역을 또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선진국 국민들은 아무리 간단한 약도를 그리더라도 위쪽은 북쪽, 오른쪽은 동쪽으로 그린다. 일반 건물에서도 '서쪽 별관' '남쪽 출구' 등으로 동서남북을 잘 이용한다. 과학이 일반에 깊숙이 들어와서 잘 이용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의 경우는 심지어 관공서에서 발행된 지도에서도 동서남북이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다.
단순히 국민 소득이 높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 사회가 되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선진 사회는 합리 사회이며 합리 사회는 과학이다. 과학이 많이 스며들어 있는 사회, 그리고 과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살기에 편리한 사회, 이것이 선진 사회다.
/이복주 단국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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