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가게에서 과일을 진열할 때 보통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올린다. 우선 제일 아래 층의 과일은 가로와 세로로 열을 맞추어 배열한다. 그 다음 층의 과일은 아래 층에 있는 과일들 사이에 생긴 틈(dimple)에 배열하고 이런 방식으로 계속 쌓아 올린다. 과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 이 쌓기 방식은 주어진 공간에 공을 가장 빽빽하게 쌓는 방법이기도 하다.직관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자명해 보이는 공 쌓기 문제는 1611년에 케플러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케플러는 동일한 크기의 공을 쌓을 때 과일가게의 방법보다 더 촘촘하게 쌓는 방법은 없다는 가설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390년 가까이 미제로 남아있던 '케플러의 추측'이다.
케플러의 추측은 결국 1998년 미시간 대학교의 토마스 헤일스가 10년간의 연구 끝에 증명해냈다. 헤일스는 공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기술하는 150개의 변수를 가진 방정식을 만들고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 방정식을 풀어냈다. 증명은 250쪽의 논문과 함께 3기가바이트에 달하는 컴퓨터 파일로 되어 있다.
과일 가게에서 과일을 쌓아 올리는 방법은 '면심입방쌓기'이거나'육각조밀쌓기'이다. 면심입방쌓기는 네 개의 공을 모아놓은 위에 생기는 틈에 공을 배열하고, 육각조밀쌓기는 세 개의 공 사이에 생긴 틈에 공을 배열한다. 언뜻 생각하면 세 개마다 하나씩 올려놓는 육각조밀쌓기의 밀도(전체 공간에서 공으로 채워진 공간의 비율)가 높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면심입방쌓기에서 생기는 틈이 더 깊기 때문에 밀도는 0.74로 같다.
실제 과일 가게의 방식으로 공을 쌓았을 때 그림에서 보듯이 아래나 위에서 보면 면심입방쌓기이고, 어슷하게 자른 단면으로 보면 육각조밀쌓기가 된다. 결국 이 두 방식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쌓아 놓은 것을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케플러의 추측은 동일한 크기의 공을 쌓을 때의 문제인데, 얼마 전에는 공간을 공으로 채울 때와 타원체로 채울 때의 밀도를 비교한 연구가 '사이언스'에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물리학자 폴 채킨 교수는 공 모양의 구슬과 타원체인 M&M 초콜릿을 무작위로 상자에 넣고 남는 공간이 얼마인지 조사했다. 실험 결과 구슬로 채울 때의 밀도는 0.64인데 반해, 타원체로 채울 때의 밀도는 0.68이어서 타원체가 공간을 더 빽빽하게 메울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연구 결과는 높은 밀도의 세라믹 물질을 고안하는 것에 이용되는 등 실제적인 활용 가치도 높다고 한다. 초콜릿 애호가인 채킨 교수가 제자들에게 연구실의 큰 드럼통을 초콜릿으로 채우라고 농담을 던졌고, 가장 많은 양의 초콜릿을 담기 위해서는 어떤 모양이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이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발견을 가져온 것을 보면 초콜릿도 좋아하고 볼일이다.
/박경미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
협찬:한국과학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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