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개방 등 선진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명쾌하게 비판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장하준(42)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부키 발행·원제 'Kicking away the Ladder')가 번역 출간됐다.장 교수는 이 책으로 지난해 말 유럽진보정치경제학회가 주는 '뮈르달 상'을 받았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1898∼1987)을 기려 제정된 이 상은 마셜, 케인스 등이 주축인 신고전학파(일명 케임브리지학파)에 대한 의미있는 대안이론을 제시한 학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상이다.
장 교수는 이 책에서 이른바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선진국들이 휘두르는 자유무역의 논리가 경제개발의 역사로 볼 때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산업혁명을 통해 부강의 기틀을 마련한 영국과 이어 경제 대국이 된 미국이다.
자유무역의 모국처럼 알려진 영국은 16세기를 전후해 모직제조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양 원모 수출 관세를 인상하거나 심지어 수출 자체를 일시 금지하는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을 폈다고 그는 설명한다. 이런 경향은 갈수록 더욱 강화돼 18세기에 들어서면 자국 내 제조업을 장려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정책들이 공공연히 입안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지금 시장 개방의 전도사처럼 된 미국은 경제사학자 폴 베어록의 말을 빌리면 '근대적 보호주의의 모국이자 철옹성'이다. 18세기 말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으로부터 시작된 산업보호 정책은 미국 경제 발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그런 시장 보호정책을 현재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이 적극 시행하려 하고 있지만, 선진국들은 자국의 과거는 묻어버리고 자유무역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기라도 한 것처럼 강요한다는 점이다. 선진국들은 19세기에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국가와 불평등조약을 통해 시장 개방을 강요한 전례가 있고, 이런 논리는 바로 근래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이 개발도상국들에게 권고하는 내용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또 선진국이 오로지 자유무역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 거짓인 것처럼 개도국에 요구하는 관세율 인하도 부당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19세기 자국의 산업에 40% 이상의 평균 보호관세를 부과했을 때 생산성의 지표인 미국의 1인당 구매력평가(PPP) 소득은 영국의 4분의 3 수준이었다. 71%의 관세율로 보호무역의 선봉에 섰던 인도는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평균 관세율을 32%로 내렸다. 인도의 PPP는 미국의 15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남북전쟁 종전과 2차 대전 사이 32%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다."
장 교수는 더불어 선진국이 지금과 같은 개도국이었을 때의 경제제도나 사회발전 수준은 현 개도국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며 일방적인 사회제도나 정책의 이식도 비판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개한 최근 20년 동안 개도국은 그 전 20년보다 성장률이 떨어졌다는 분석을 들며 신자유주의가 결코 경제성장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가 자유무역이 완전히 잘못된 정책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건 아니다.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으로 부를 이룬 뒤 개도국들이 따라 오르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선진국의 위선적인 세계화를 비판하는 것이 중점이다.
결론은 강요된 '글로벌 스탠더드'를 일방적으로 따르기보다 선진국들의 과거 정책과 제도를 잘 살피고, 현실에 맞는 정책을 창의적으로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90년부터 이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2년 6월 영국에서 출간된 '사다리 걷어차기'는 포르투갈어, 터키어로 번역됐고 프랑스어 스페인어 페르시아어 중국어판이 잇달아 출간될 예정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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