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수능방송 1개월째인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강북의 A단과학원. 5월 개강반 접수를 하루 남겨놓았지만 접수창구는 한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돈다. 한두 명의 학생만이 강사명단과 강의시간표가 빼곡히 적힌 팸플릿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30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시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단과명문으로 통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한 반에3∼4명씩 앉혀 놓고 강의하는 경우도 많아요. 30∼40명씩 교실을 채워야 정상인데 3∼4명이라니 정말이지 착잡한 심정입니다." 1972년 입사해 올 4월 원장으로 취임했다는 L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도 2,000여평의 대지 위에 건물만 세 동, 그리고 개설강좌 70여개에 강사 50명이 넘는 대형학원이 폐업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됐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적자운영이 불 보듯 뻔하다.
"이대로 가다간 학원들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정부방침이 그렇다니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있어요. 정말 학원을 죽이겠다는 건가요." L씨는 "학생 수가 전보다 50% 이상 줄면서 강사들도 불안감에 동요하고 있다"고 절박한 위기감을 드러냈다.
1개월째를 맞은 EBS 수능방송이 어느 정도 정착해가고 있는 데다 야간 보충·자율학습과 경기침체까지 겹치면서 학원가가 급격한 구조조정의 소용돌이로 내몰리고 있다.
서초 강남 송파 강동 목동 등 '사교육 특구'로 불리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서울 대부분의 지역에서 학생수가 20% 가량 줄었다는 것이 학원업계의 분석이다. 특히 A학원 같은 단과학원이나 소규모 보습학원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서울의 또 다른 유명 단과학원인 B학원은 최근 도산설이 나돌았다. 고교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이 학원의 야간반 수강생이 지난해에 비해 30% 가량 줄었기 때문에 소문은 설득력 있게 퍼져 나갔다. C원장은 "학원이 문을 닫는다는 소문은 사실 무근이지만, 사교육 대책으로 운영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라며 "인근의 다른 단과학원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말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소규모 보습학원 중에서는 실제로 문을 닫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송파·강동지역 학원협의회장인 김웅곤 송파청솔학원 원장은 "소규모 학원 가운데 30% 가량은 전화조차 안 받는다"며 "수강료 수입이 월세 강사료 광고료 차량비 등 경상비에도 못 미쳐 폐업하는 소규모 보습학원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한 학원이 강사 1명을 뽑기 위해 모집공고를 내자 400여 명이 지원했다. 1∼2년 전 학원강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것에 비춰보면, 일자리를 찾지 못한 강사가 그 만큼 많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동작구 보습학원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한 원장은 "고등부 학원 원장들을 만나면 모두들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소연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서울 은평구의 D보습학원은 "가난한 동네이다 보니 학부모들이 'EBS가 좋다고 하니까 그냥 EBS만 보라'고 자녀들에게 권하는 것 같다"며 "20∼30명이 다니던 고등부를 최근에 없앴다"고 말했다. 또 EBS 수능강의로 직격탄을 맞은 온라인 수능업체 두 곳이 조만간 사이트를 폐쇄할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하다.
이에 따라 일부 학원과 온라인 수능사이트들은 EBS 무료특강반 또는 주말반을 개설하거나 EBS와는 다른 특화 서비스를 개발하는 등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그러나 종로 대성 등 명문 재수생 학원과 강남과 목동 등의 유명학원들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정부의 사교육대책이 '절반의 성공'으로 불리는 이유는 수능방송의 관심이 점차 떨어지면서 이것이 바로 강남 등의 '불패신화'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남과 목동 지역 학원들은 최근 빠르게 기세를 회복하고 있다. 목동의 한 학원장은 "EBS 시작 전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90% 정도가 'EBS와 학원을 병행하겠다'고 했지만 요즘은 대부분이 'EBS만으로는 안 된다'고 대답한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목동의 또 다른 학원장은 "사교육 비중이 높은 강남이나 목동 지역은 EBS의 타격이 5% 미만이라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학원가의 어려움은 일선 학교의 강제적인 보충·자율학습도 크게 작용했다. 학교가 밤 10시까지 학생을 붙잡아두고 학원의 밤 10시 이후 영업은 단속하는 '협공'이 효과를 발휘할 수밖에 없다고 학원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한 학원 관계자는 "학교가 '내신성적'이라는 칼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학생이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하라는 학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전국교직원노조가 홈페이지에 개설한 '보충수업 파행사례 신고센터'에는 최근까지 1,200건이 넘는 강제수업 사례가 접수됐다. 인위적인 힘에 의해 형성된 학원의 열세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학원가의 낙관론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학부모의 입김이 강한 강남 지역에서는 강제적인 보충·자율학습이 어려워 강남 학원 학생수의 변동은 거의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스타강사를 동원한 EBS 수능강의 역시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강남 학부모의 차별화한 교육 욕구를 애초부터 만족시킬 수 없었다.
특히 학원가에서는 '정부가 학원 죽이기에는 성공할지 몰라도 사교육비 경감에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냉소적인 평가가 많다. EBS교재 구입 및 강의시청을 위한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는 데다 방송교육의 특성상 대면교육이 힘들어 이를 보강하기 위한 또 다른 사교육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창현 한국학원총연합회 사회교육연구위원장은 "보충·자율학습으로 학생을 밤늦게까지 잡아두면 학원 수요는 줄어드는 대신 고액과외는 늘어나는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고 꼬집었다. 사교육비 경감대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불꺼진 과외방
서울 강남과 목동 등에서는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후폭풍이 잦아들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도 과외방은 타격이 컸다.
미신고 고액과외 등으로 밤마다 불야성을 이뤘던 목동 오피스텔의 과외방 시장은 현재 과외방으로 쓰였던 오피스텔 매물이 100여 건 가까이 쏟아져 나오는 등 분위기가 급속도로 식고 있다.
3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목동의 대표적인 과외방 오피스텔로 꼽히는 현대월드타워는 현재 전 평형대에 걸쳐 50여건이 매매 및 임대매물로 나와 있다. ERA월드우성부동산 관계자는 "목동 현대월드타워에 입주한 600여 개의 사무실 가운데 200여 곳이 과외방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EBS 수능강의의 여파로 학생수가 줄어든 데다 과외방 단속이 강화돼 과외방 업주들이 오피스텔을 대거 빠져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인근 현대41타워, 하이베라스 등에도 매물이 10여건 이상씩 나와 있으며 이중 상당수는 과외방으로 이용됐던 매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중개업소 관계자는 "EBS 수능강의 여파와 경기침체로 과외방 운영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매물을 내놓고 있는 반면, 수요자는 나서지 않아 가격이 하락세에 있다"고 전했다.
사교육 1번지인 대치동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10∼20평의 소규모 과외방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송복 부동산랜드 대치동삼성지점 대표는 "이 일대 부동산 중개업소마다 과외방 매물이 3∼4건씩 나와 있어 합치면 100여 개 가까이 될 것"이라며 "경기침체 탓도 있지만 EBS 수능방송의 영향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외방 시장을 빠져나간 강사들이 가정으로 파고들어 고액의 불법과외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서울 시내의 한 학원장은 "소규모 학원이나 과외방이 무너지면서 이들이 고액과외시장으로 다시 유턴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사교육비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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