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최순영 당선자는 외모만 보면 영낙없는 '모범생'이다. 유신독재에 조종(弔鐘)을 울린 YH사건을 이끌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말투와 온화한 인상의 그는 "이제는 모범적 국회의원이 되겠다"면서 신발끈을 조여 매고 있다.최 당선자가 가발을 생산하던 YH 무역에 입사한 것은 17살 되던 해인 1970년. "사실 기술이 좋은 편이어서 하청 공장을 차릴 생각을 하고 있었죠." 착실한 '공순이'를 운동가로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사업주와 권력이었다. "노조 결성 1주일 뒤 해고됐는데 회사 측에서 돈으로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게 괘씸해 더 열심히 했어요." 노조원들은 그를 '위원장님'이 아니라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시련의 시작은 79년 일방적 폐업 통보였다. 기숙사에 경찰이 진입하자 노조원들은 신민당사로 몰려갔다. '회사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내건 농성은 진압 작전 개시 23분 만에 끝났다. 진압 도중 노조 상임집행위원 김경숙은 목숨을 잃었고 최 당선자는 임신 6개월의 몸으로 구속 수감됐다. 참담한 결과였지만 여성 노조원들에 대한 무력 진압은 부마 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최 당선자는 "내게 노동운동은 의미 이전에 삶 자체"라고 말한다. 진로를 틀었을 뿐 삶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하다는 것.
노조 활동가 교육 현장에서 만나 최 당선자와 결혼한 남편 황규석 씨도 결국 옥고를 치렀다. 최 당선자는 "결국 우리 세 가족은 감방동기인 셈"이라며 웃었다. 남편 황 씨는 YMCA에서 사회운동을 계속하며 최 당선자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고 있다.
83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여성부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의 지평을 넓히던 그는 91년부터 두 차례 부천시의원에 당선, 현장형 의정 활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스스로 "지사도 투사도 아닌 그저 삶으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최 당선자는 여성,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정 활동을 다짐하고 있다.
/범기영기자 bum7102@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