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魯會燦)씨는 속된 말로 한창 뜨는 '스타'다. 그 많은 정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웬만큼 인기 있다는 대중 연예인들을 포함해서도 그처럼 요즘 TV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있을까. 더구나 출연 프로그램란 게 한시간은 쉽게 넘기는 토론물들이니 시간으로 따지자면 아마 뉴스 앵커를 제외하면 단연 압도적일 것이다. TV 뿐이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어 '노회찬'을 치면 차마 다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의 콘텐츠가 뜨고, 내용 하나하나마다 댓글들이 감자줄기 마냥 주렁주렁 달려 나온다.그에게 쏟아지는 열광을 온전히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약진에 따른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의 독특하고도 신선한 캐릭터가 아니었어도 그만한 각광을 받았을까. (사실 미디어에 의해 선택되고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는 대중문화적 속성이 그의 인기에 상당부분 깔려있음을 부인키는 어렵다) 이념이나 주장이 아닌,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려 그를 만났다. 어차피 그가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지향은 이제 익숙해졌거니와, 삶을 다루는 이 지면에 합당한 것도 아닐 터이니.
(우선 그를 만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음을 털어놓아야 겠다. 총선을 전후해 워낙 바빠진 데다, 지난 주말엔 노동절 행사까지 끼었다. 여러 차례 연락과 조정 끝에 어렵게 당사 사무총장실에 자리가 마련됐다. 약속시간을 넘겨 허겁지겁 돌아온 그에게 채 질문을 하기도 전에 총무직원이 빼꼼 문을 열었다. "조금 있다가 생방송 가야 합니다." 이렇게 다급하고 난감한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노회찬씨는 확실히 묘한 매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을 지녔다. 입가의 미소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다. 그러나 방심하지 말진저. 안경 속 그의 안광은 서늘하다. 대단한 달변가이되 그렇다고 매끄러운 언변가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조는 어눌하나, 논리와 비유는 촌철살인이다. 절묘한 부조화의 조화랄까. 이런 모습은 그가 살아온 삶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노씨는 부산 태생이다. 부모님은 한국전쟁 때 내려온 함경도 피난민이다. 월남 1세대라면 이념적 경직성이 유별난 법. 그 슬하에서 '골수' 사회주의자가 나왔다는 건 아이러니다. (이북 출신들 중에는 '노동당'이라는 명칭 자체에 진저리치는 이도 많다) 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부자는 아니었어도 생활을 염려할 정도는 아닌 가정에서 그 또한 굴곡없이 자랐다. 부산중학 때까지 줄곧 반장을 맡을 만큼 책 좋아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고교입시에서 떨어진 뒤 상경해 재수하던 중 결정적인 삶의 전기를 만난다. '10월 유신'이었다.
"오후 학원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방송을 들었습니다. 이상했어요. 대통령 중심제인 나라에서 내각제에서나 가능한 국회 해산을 한다는 게. 학교에선 그렇게 안 배웠거든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집에 와 책을 찾아보니 제가 알고있던 게 맞더라구요. '그럼 헌법 위반이잖아'." 저녁 때 다시 나가 본 광화문과 국회의사당 앞에는 탱크와 장갑차들이 진주해 있었다. 화가 나 밤중까지 거리를 배회했다. "그 날 가판신문에는 1면 톱 제목이 '국회해산'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배달된 신문은 '10월 유신'으로 바뀌었어요. 기사의 본질이 바뀐 거지요. 그 두 신문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그는 그 해 경기고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전의 그가 아니었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듯. 학교 공부는 제쳐두고 철학, 사회과학 서적에서부터 '사상계' '창작과 비평' 등 사회의식이 담긴 책들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우리 학교는 두개 문화가 공존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집안 좋은 서울학생들과, 저 같은 지방출신들과…." 매달 광화문에서 탕수육을 사먹던 그 친구들과 사회의식을 교류했다. 그렇게 해서 고교 1학년 때 첫 '일'을 벌였다.
"유신 1주년에 즈음해 유인물을 만들었습니다. 직접 쓴 글에다 서울대 4·19선언문의 그 유명한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귀절을 적어넣고 해서. 철필로 긁어 프린트하면 필체가 드러날까봐 청계천 인쇄소들을 뒤졌는데 다들 손을 내젓습디다. 간신히 한 곳을 찾아 2,000부를 인쇄해 밤에 학교 곳곳에 뿌렸습니다." 이튿날 등교해보니 경찰이 학교 안팎을 둘러싸고 있었다. "다행히 학교에서 색출하려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좋은 일'도 한 셈입니다. 조기방학을 해 친구들이 모두 좋아하더라구요." 2학년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을 때는 학교에서 성명서를 읽었다.
백기완(白基玩), 함석헌(咸錫憲) 선생의 강연마다 쫓아다니고, 신문의 칼럼이 마음에 들면 그 논객을 찾아가 강연을 부탁했다. 월간 '다리'를 발간하던 김상현(金相賢)씨의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지금은 학교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거절 당한 일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서점을 뒤지는 건 일과가 됐다. 하루에 책방을 두번 간 날도 있다고 했다. 먼저 산 책을 다 읽어치우고는 또 다른 책을 사러. 관악, 성북경찰서 형사들이 일찌감치 이 불온한 고교생을 따라 붙었다.
그렇다고 노씨가 강팍한 학창생활을 했던 건 아니다. 그는 상당 수준의 음악도였다. 중학교 때 웬만한 집에서는 꿈도 못 꿀 첼로 교습을 받았다. 험한 피난살이 중에도 오페라 구경을 다녔을 만큼 예술적 교양을 중시했던 아버지 덕이었다. 고교에서도 음악선생님의 주선으로 당대의 유명 첼리스트에게 무료 사사를 받았다. 본인은 취미가 기특해 배려를 받은 것 같다고 하지만 재능이 없었다면 가당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를 읽다가 감흥이 일면 즉석에서 곡을 만들었을 정도였다니까. "예술은 누구나 많이 접하고 배워야 합니다. 정서도 순화될 뿐 아니라 사회적 상상력도 길러집니다. 삶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그가 그리는 미래에 '국민 모두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아는 문화국가'가 포함된 이유를 이해했다)
입시공부를 통 안했으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가려는 대학은 딱 두 곳 뿐이었어요. 서울대와 고려대. 데모를 제일 잘하는 학교였거든요." 군을 제대하고서야 79년 고려대 정외과에 들어갔다. 여기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눈을 떴다. "80년 광주항쟁과 '서울의 봄'을 거치면서 지식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지요. 노동 쪽은 공부하려 해도 매뉴얼이 없어 혼자 남산도서관에 다니고 선운사 암자에도 들어가고 하면서 독학 했습니다."
대학 때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딴 것도 평생을 노동자들과 함께 보내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자격증으로 곧 현장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위장취업'이란 말도 없던 때였다) 82년부터 7년 동안 수배를 받은 끝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복역하고 이후 진보정치연합,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등을 거쳐온 그의 정치적 행로 등은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상술할 필요는 없겠다.
그가 지금도 "가장 성공한 일"이라고 자평하는 두살 연상 아내와의 만남은 인천에서 현장운동을 할 때 이뤄졌다. 아내는 16살 때부터 언니의 주민증으로 생활전선에 나섰던 중졸의 노동자였다. '여성의 전화' 등에서 남편 못지않은 사회운동을 펼치는 아내와는 똑같이 가사를 분담하는, 그야말로 '평등부부'다. 18년 동안 자취생활로 얻은 자신의 살림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김치 담그는 일까지.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 서른 넷, 서른 여섯 늦은 나이에 결혼한데다, 수배, 복역 등 여러 상황들 때문이었다.
노씨가 누구보다 애틋해하는 이는 부모님이다. 본인이야 선택한 신념에 따라 살아왔다고 해도 부모로서는 공부 잘하던 아들이 험한 길만을 골라 가는 게 속 타지 않았으랴. "20년 전쯤에 집 주변에 대한 경찰 감시가 심해지면서 제가 하는 일을 알게 됐지요. 당연히 놀래시고 크게 화를 내셨어요. 그렇지만 길지는 않았어요." 10년 전인가, 어머니가 10권이나 되는 스크랩 북을 내놓더란다. 노동운동을 하는 아들을 위해 신문에 나온 노사문제 관련 기사들을 꼼꼼하게 오려 모은 것이었다. 눈물이 핑 돌더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러면서도 "왜 하필 이 길이냐"며 못내 서운해하시더란다. "며칠 전에도 어머니가 또 10권이나 되는 스크랩 북을 주시더라구요. 이번엔 정당, 정치관련 기사들을 모은 것이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잠깐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지금 인기가 '거품'일 수도 있다는 걸 잘 안다. "3급수에 열목어, 산천어를 집어넣어 봐야 다 죽어버린다 (방송에서)"는 게 자칫 스스로에 해당되는 얘기일 수도 있다는 것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우직하게 평생 교과서대로 살아온' 공력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그러니 한번 지켜 볼 일이다. 비록 그의 이상과 이념을 '위험'하다고 못마땅해 하는 이들이 많기는 해도 뭐 어떤가. 그 또한 우리 사회가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니.
이준희/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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