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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간 등정의 발자취/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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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간 등정의 발자취/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입력
2004.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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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등정의 발자취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김은국 김현숙 옮김

바다출판사 발행·3만8,000원

인간의 문명과 지성의 발달사를 단번에 알려고 덤벼드는 것은 헛된 일이다. 나무 열매를 따먹고 짐승 가죽을 두르던 시대부터 생명과 유전의 비밀을 풀어내고 화성을 탐사하는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정을 어떻게 짧은 글로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 등정의 발자취'(원제 'The Ascent of Man')를 읽다 보면 그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부를 만한 세계적인 석학 제이콥 브로노우스키(1908∼1974)가 그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만물 박사'인 그가 죽기 1년 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인간의 광활하고 심오한 발자취를 추적한 역저이다. 책의 제목은 원시인에서 현대의 인간으로 진화해서 내려온 과정을 집약한 다윈의 저서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를 빗대어 붙였다.

그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거나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은 물론 자연과 우주, 생명의 신비 등을 하나의 거대한 봉우리로 보았다. 처음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봉우리도 인간은 무한한 상상력과 이성, 불굴의 정신으로 극복하고 더 높은 고지를 향해 나아갔다. 위대한 발견과 발명, 경이로운 건축과 예술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방편이자 부산물이었다. 영국의 시인 예이츠가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들'이라고 불렀던 것들이다.

그의 여정은 아프리카 적도 남쪽의 타웅이라는 지역에서 시작된다. 인류의 배꼽, 문명의 발상지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발견된 어린이 유골은 인간의 기원을 찾아낸 출발점이었다. 이후 불의 발견과 잡종 밀의 개량이 가져온 농업혁명을 거쳐, 잉카문명의 마추픽추와 유럽의 고딕성당, 연금술과 원자론, 유클리드와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뉴턴과 아인슈타인, 산업혁명, 다윈, 핵물리학 등을 더듬어 나갔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방대한 지식과 사례를 하나하나 치밀하게 꿰고 엮어가면서 필요할 때마다 저자가 문명비평가, 과학해설자, 미술사학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브로노우스키는 잉카문명이 스페인의 무식한 모험가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게 된 것은 제국성립의 요건인 도로, 다리, 통신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들은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도로에는 바퀴 달린 수레가 없었고, 다리에는 혁명적 건축기법인 아치가 없었으며, 통신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또 음은 정수로 현을 정확히 등분한 소리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이야기, 1564년생 동갑내기인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이탈리아의 갈릴레이가 베네치아에서 활동할 당시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국제정치의 역학구도, 예술과 과학의 위상 등을 설명한 내용도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밖에도 고고학, 문학, 건축, 조각, 생물학, 물리학 등을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사고를 풀어가는 저자의 능력을 보고 있노라면 "무슨 이런 괴물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기조차 한다.

이 책의 모체는 1973년 영국 BBC 방송에서 방영된 13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 이 프로그램에서 저자는 직접 원고를 쓰고 해설을 맡았다. 국내에는 76년 '인간 역사'라는 제목의 축약본으로 소개됐다가, 86년 같은 제목으로 범양사에서 완역판이 나왔다. 당시 이 책을 번역한 재미 소설가 김은국씨는 "비행기나 컴퓨터의 원리원칙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는 '교육받은 무식한 사람'으로서 무력한 체념의 순간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브로노우스키"라며 "이 책은 20세기를 위한 하나의 종합된 철학"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저자가 세상을 떠난 후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세계는 더욱 발전하고 더욱 높은 봉우리도 넘었다. 하지만 암과 같은 질병은 여전히 정상을 인간에게 내주지 않았고, 당시에는 알지 못하던 에이즈, 조류독감 등도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과연 이런 고지는 언제쯤 밟을 수 있을까.

/최진환기자 choi@hk.co.kr

■브로노우스키는 누구

저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사진)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기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연구의 권위자이면서 극작가이자 발명가로도 활동했고, 말년에는 과학해설자로도 이름을 날렸다. 1908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열두살 때 영국으로 귀화한 후 1942년부터는 군사연구소에서 세계2차대전의 전시과업을 맡았고,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효과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타웅에서 발견된 어린이 두개골 연구에 참여하면서 생명과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그 독특함은 어디에서 비롯했는가를 풀려고 했으며, '인간등정의 발자취'는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였다. 그는 이 책을 펴낸 지 1년 후 사망했다. 이밖에 대표저서로는 '과학의 상식'(1951) '과학과 인간의 가치'(1956) '서구의 지적 전통'(1960) 등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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