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하나일지 모르나 그 모습과 내용은 모두 다르다. 잠자다 조용히 '저 세상'으로 떠나는 평화로운 죽음이 있는 반면 고통스럽고 억울한 죽음이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죽음도 분명 존재한다.서울법의의원·연구소 한길로(42) 원장은 죽음의 원인과 모습을 정확히 가려내 죽은 자와 산 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을 한다. 그는 대학에서 병리학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 시절 법의학으로 진로를 바꾼 뒤 고려대 법의학교실 교수,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법의관으로 일하다 4월초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법의학 전문기관을 차렸다. 그에게서 죽음, 그리고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답은 현장에 있다"
사건 파일 #1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젊은 여자가 목을 매 숨졌다. 정황으로 봐 자살이 거의 확실하지만 섣불리 단정 내리는 것은 금물. 목을 맨 줄이 피부를 파고 들어 상처를 남긴 것을 확인하고 '자살로 추정됨'이라 적으려는 순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상처를 파고든 줄의 모양이 피부에 남은 흔적과 다른 것이다. '목의 상처를 꼼꼼히 살필 것'이라고 적힌 검안 소견서와 함께 시체는 국과수로 보내진다.
사건 파일 #2 한강 다리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자동차는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방치돼 있고 운전자는 사라졌다. 조수석 창문이 깨져 있는 것이 이상했지만 힘을 받는 각도에 따라 충분히 운전자가 오른쪽으로 튕겨 나갈 수 있는 상황임을 확인하고 일단 차를 견인했다. 며칠 후, 시신이 발견됐다는 연락이 와 이를 확인한 결과, 이럴 수가. 시신의 머리에는 긁힌 상처 하나 없는 것 아닌가. 조수석 창문은 왜 깨졌고 운전자는 왜 한강에 빠진 것일까.
위의 두 사건은 법의학자의 현장 감식이 왜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첫번째 경우, 겉으로 봐서는 자살이 거의 확실해 현장에 법의학자가 없었다면 시신은 몇 장의 사진만 찍힌 후 '자살'로 결론지어져 간단한 부검을 위해 국과수로 직행했을 것이다. 목을 맨 줄은 함께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두번째 사고 역시 현장에 법의학자가 없었다면 오랜 기간 수 많은 '물음표'만 남겼을 사건이었다. 한 원장은 조수석 문이 열려있었던 점, 바닥에 돌멩이가 많았던 점 등 주변 정황을 종합해 경찰과 국과수에 검안 소견서를 보냈다.
내용은 운전자가 달리던 중 조수석 창을 깨고 돌덩이가 튀어 들어와 놀랐고 이 와중에 난간에 차를 들이받았으며 차가 기울어져 운전석 문이 잘 열리지 않자 운전자는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발을 디뎠는데 그 곳은 허공이었고 운전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한강으로 추락했다는 것이었다.
"죽음의 사연은 모두 다르다"
"국과수에 있으면서 많게는 하루 다섯 구의 시신을 부검했습니다. 3년간 약 1,000건을 처리했으니 '법의학은 실무다'라는 생각으로 학교를 떠나 국과수로 간 보람은 있었던 셈이죠. 그러나 부검실과 사무실을 주로 지킬 뿐 현장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 저에게는 큰 한계로 느껴졌습니다."
응급실 당직 의사가 주로 작성한 시신 검안서는 '미상' 투성이일 때가 많았고 심지어 현장 사진도 볼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업무의 한계를 절감한 한 원장은 결국 동료들에게 "현장에 나가서 직접 검안을 해야겠다"고 선언하고 국과수를 떠났다. 12명의 동료 '의무 사무관'들은 우려와 기대가 반씩 섞인 눈으로 한 원장을 배웅했다.
서울 법의학연구소가 문을 연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한 원장은 "시작은 일단 성공"이라고 평했다. 현재 용산 서초 강남 등 세 개 경찰서와 계약해 변사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의 요청을 받아 현장으로 달려가 검안을 한다. 세 경찰서를 합치면 한달 평균 약 70여건의 변사가 발생, 녹록치 않은 작업량이지만 현장의 모습과 정황은 하나같이 다르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다.
"지금까지 1,000건이 넘는 죽음의 원인을 분석했지만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한 건 한 건 풀어나갈 때마다 '이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라고 무릎을 치며 놀랄 정도로 죽음의 모습은 모두 다르더군요."
"사람이 죽는 날은 정해져 있다"
한 원장은 "현장 감식반의 이야기를 다룬 외화 'CSI(Crime Scene Investigation)'가 인기를 끌면서 법의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법의학자의 일상과 현실은 큰 차이가 있다. 어두운 회의실에서 시신의 부분 부분이 찍힌 슬라이드를 착착 넘기며 사인을 분석·발표할 때의 모습은 명탕점 셜록 홈즈 못지 않지만 막상 시신을 부검하고 사고 현장을 살필 때는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
"공포 영화가 시시하고 재미 없어서 안볼 정도입니다. 처음 법의학을 시작했을 때는 죽은 사람의 고통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한 느낌을 받아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사인을 분석하다 보면 '법이 이렇게 가벼워서 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에는 흉악한 범죄가 많아요.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형 찬성론자가 됐습니다."
한 원장은 "법의학을 하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누구나 죽을 때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적이며 죽는 날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현장 출동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경차를 타고 다니는 한 원장을 '위험하다'며 말리던 친구들에게도 "너희가 아무리 외제차 타고 다닌다고 수명을 1초라도 늘릴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맞받아쳤다.
그의 희망은 법의학자, 의사, 변호사 등이 함께 하는 법의학 전문 회사를 차리는 것이다. 흔히 법의학을 범죄와만 연관해 생각하지만 다툼이 생겨 상해 진단을 해야 하거나 보험 약관에 관한 해석에 의문이 생길 때와 같이 일상 생활에서 법의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생각보다 많다.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부검을 국과수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법의학자의 수가 늘어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국과수에 속한 법의학자들의 직급은 '사무관'으로 일반 공무원에 속해 일이 많아도 증원을 하기 거의 불가능하죠. 죽음에 관한 조사가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가족과 사회가 납득할 수 없는 의문만 잔뜩 남게 되는데 서울에서 한 해 발생하는 변사사건 약 4,000건 중 제대로 해결되는 것은 1,000여건에 불과해요. 제 연구소가 국가가 커버하지 못하는 죽음의 영역을 돌보는 대안으로 자리잡게 되기를 바랍니다."
/글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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