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나 자동자 부품을 제작, 대기업에 납품하는 지방 중소기업 S사는 매년 대기업의 납품단가 인하 요구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해 존폐의 위기에 몰려 있다. 지난해 말부터 원자재값 상승으로 원가는 20% 가까이 치솟았는데 대기업에선 오히려 납품가를 3% 인하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 사장은 "대기업에서 거래를 끊겠다고 하는 순간, 우리로서는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니 대기업이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도 해야 하고, 몸종 신세도 마다하지 않는 형편"이라고 하소연했다.
내수침체와 원자재값 상승 등으로 위기에 몰린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납품 횡포로 고사 직전에 몰려 있다. 노사분규로 대기업 직원들의 임금이 오르거나 원자재값이 상승하면 그 인상분은 고스란히 중소기업이 떠안아야 한다. 대기업들은 환율변동으로 경영환경이 변하면, 그 충격을 중소기업에 전가하기 일쑤다. 현재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80%는 대기업과 거래를 하고 있는데 겉으론 '공생 및 상생의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주종 관계나 다름없다.
한 지방공단에서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B사 이 모(53) 사장은 매년 납품하는 대기업의 임금협상이 끝날 때쯤이면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으로 달려간다. 임금협상이 끝나면 대기업 직원의 임금이 올라가게 되고 인상분은 고스란히 납품단가 인하로 전가되는 악순환이 몇 년째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장은 "대기업과 중소 납품업체간에는 원자재값이 10%정도 오를 경우 단가 인상 요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게 관행처럼 돼 있으며 매년 5% 내외의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받고 있다"고 실토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최근 대기업의 중소협력업체 202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납품애로 실태조사 결과, 중소기업들이 받은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 유형으로는 '매년 단가인하'가 57.5%로 가장 많았다. 이는 2002년 43.2%에 비해 14.3%포인트 늘어난 것으로 단가인하 요구가 더욱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하도급대금 60일 초과지급'이 13.9%, 대기업의 발주취소나 변경 12.7%, 어음할인료(지연이자) 미지급 11.5% 등의 순으로 나타나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갖가지 횡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 같은 대기업 횡포에 중소기업으로선 거래가 끊길 것을 우려해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협중앙회 조사결과, 대기업으로부터의 불공정한 하도급거래 행위에 대해 중소기업의 91.2%(2002년 85.7%)가 '거래단절 등이 우려돼 그냥 참았다'고 답했다.
독자적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도 한번 대기업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면 '몸종' 신세가 돼버린다. 대기업이 계약서에 수출이나 다른 업체와의 거래를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기 때문이다. 전자기기 핵심부품 국산화에 성공한 P사는 2001년 한 대기업에 납품을 하면서 '알짜기업'으로 부상하며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이 업체는 부품을 해당 대기업에만 독점 공급하는 대신, 동의를 받지 않고 다른 업체에 제공하면 계약을 해지한다는 계약 당시 조건 때문에 한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수출 의뢰를 받았지만 결국 이를 포기해야만 했다.
가전업체에 전자기기 핵심 부품을 납품하는 K사는 최근 제품의 성능을 크게 개선해 주는 부품 개발을 마쳤으나 거래 대기업의 압력으로 특허 출원을 포기했으며 대신 해당 대기업이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기협중앙회 관계자는 "중소기업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공정경쟁 시스템 구축 및 불공정한 하도급거래 관행을 일삼고 있는 대기업에 대해 무거운 과징금 부과 및 불공정 사례 언론공표 등 강력한 제재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양준기자 naig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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