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봄은 향기로 익는다. 아카시아꽃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되바라진 냄새가 아니다. 느낄 수 있을 듯 말 듯한 은은함과 중후함, 바로 차(茶) 향기이다. 5월에 접어들면 남도의 차밭은 분주해진다. 햇차를 따는 시기이다.이제 녹차는 웰빙에서 빠질 수 없는 덕목이다. 차중의 으뜸이라는 우전(雨前)이나 세작(細雀)를 찾는 사람이 급속히 늘고, 커피 대신 뜨거운 물에 티백를 우려 먹는 것이 일상화할 정도다. 그렇다면 이번엔 차의 근본부터 배우는 진짜 다도(茶道) 생활을 시도해보자. 차의 고장 전남 보성군으로 향한다.
보성은 ‘삼보향(三寶鄕)이라 불린다. 선각자와 충신열사를 많이 배출한 의향(義鄕), 민족음악인 보성소리가 탄생한 예향(藝鄕), 생명연장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되는 차의 본고장 다향(茶鄕)이다. 이 중 다향이라는 별칭이 가장 앞에 설 정도로 차는 이 지역의 최고 명물이 됐다. 270여 농가가 차밭을 일궈 연간 4,800여 톤의 차를 생산한다. 전국 생산량의 40%에 이른다.
보성의 차는 먼저 눈으로 맛본다. 산 능선에 조성된 차밭을 구경하러 간다. 사진으로는 많이 대했더라도 실제로 보면 느낌이 전혀 다르다. 보성읍에서 회천으로 빠지는 18번 국도를 탄다. 봇재라는 고개를 넘게 된다. 고개에 오르면 차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예고편에 불과할 뿐이다.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8각정이 나타난다. 차를 멈추고 정자에 오른다. 일부러 시선을 발끝에 두고 계단을 올라 정자의 난간에 선다. 그리고 고개를 든다.
탄성이 아니라 비명이 터져 나온다. 거대한 초록 구렁이 수천 수만 마리가 산 기슭을 덮고 있다. 꿈틀대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인간이 먹는 작물을 이용해 만든 조형물 중 단연 압권이다. 멀리 영천제(호수)의 물빛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면 더욱 환상적이다.
이제 입으로 보성의 차를 맛볼 차례이다. 봇재를 넘는 18번 국도변에는 각 다원과 제다업소에서 운영하는 시음장이 널려있다. 분위기 등을 고려해 추천할 만한 곳은 대한다업(061-852-2593), 몽중산다원(852-2255), 봇재다원(853-1117), 신옥로제다(852-8283) 등이다.
가능한 한 다양한 차를 마셔본다. 각 차의 특성과 향기, 맛 등을 꼼꼼하게 물어 적는다. 시음했던 차 중 마음에 드는 차가 있으면 돈을 내고 자리에 앉아 본격적으로 맛과 향을 음미해보자. 기왕이면 다례(茶禮)도 배운다. 다례는 생활다례, 접빈다례, 의식다례 등 다양하다. 초보자라면 집에서 평소 행할 수 있는 생활다례와 차 우리는 방법 등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자. 흡족했다면 차 한통을 살 수도 있다. 생산지라 값이 저렴하다. 상품(上品)이 4만원선이다.
녹차는 아니지만 보성에는 녹차를 이용한 독특한 먹거리가 있다. 녹차된장, 고추장, 국수, 떡, 유과 등은 기본. 녹차를 먹여 키운 소와 돼지도 있다. 보성의 특산품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확실히 녹차는 보성의 효자인 셈이다.
입 다음에는 온몸으로 녹차를 맛본다. 봇재를 넘어 회천에 이르면 율포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이 곳에 해수ㆍ녹차온천탕(061-853-4566)이 있다. 바닷물에 녹차를 넣어 끓인 물로 목욕을 한다. 한꺼번에 4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어른 5,000원, 아이 3,000원.
녹차의 맛과 향기에 푹 젖었다면 보성을 돌아본다. 최근 가장 유명한 여행지가 된 곳은 대한다원. 비구니와 수녀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CF를 비롯해 각종 영상물을 찍은 무대이다. 특히 입구의 삼나무길은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산을 좋아한다면 일림산에 오른다. 국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철쭉 군락이 있다. 지금 그곳은 붉은 바다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보성 다향제
차의 계절을 맞아 보성다향제가 5월5~9일 보성체육공원, 각 다원, 일림산 등에서 열린다. 차의 본향임을 알리기 위해 1975년 처음 시작돼 올해로 30회를 맞는다.
국내 차문화 교류전, 한국 차아가씨 선발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데 관광객의 관심을 끄는 것은 평소에 접하기 힘든 체험행사. 체험행사는 찻잎따기 체험과 차 만들기 체험 등 두 가지. 찻잎따기는 5월7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보성다원 등 관내 다원에 직접 들어가서 한다.
단체는 30일까지 신청을 해야 하지만 가족단위의 관광객은 당일 접수가 가능하다. 차 만들기는 행사기간 내내 다원과 체육공원에서 열린다. 역시 관광객은 당일 접수할 수 있다.
차음식 페스티벌도 웰빙족에게 흥미로운 행사.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4의 차요리 전문가를 초빙한다. 각종 차음식을 전시하고 시식하는 체험장을 운영한다. 매일 2회씩 차음식 강좌도 연다. 보성군청 문화관광과 (061)850-5223, 4
■녹차의 종류와 효능
차는 발효 정도와 따는 시기에 따라 분류된다. 발효란 찻잎의 탄닌 성분에 산화효소가 작용해 색이 누런색이나 검은 자색으로 변하며 독특한 향기와 맛이 만들어지는 작용이다. 85% 이상 발효시킨 것은 홍차 종류이고, 20~60% 발효된 것은 중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쟈스민차, 우롱차, 철관음 등이다. 녹차는 발효가 아닌 덖음(볶듯이 살짝 익히는 것) 과정을 거친 것으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차는 발효되지 않은 녹차이다.
녹차의 채취시기는 곡우(4월20, 21일)부터 백로(9월8, 9일)까지이다. 봄에 두 번, 여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씩 보통 4번을 채취한다. 첫 수확인 맏(첫)물차는 곡우부터 입하까지. 이 때의 차는 잎이 채 펴지지 않은 어린 순이다. 녹차 중 상품(上品)인 세작으로 불린다.
곡우 전에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찻잎을 따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우전(雨前)이라는 최상품 차이다. 두물차는 5월 하순부터 6월 상순까지 수확한 차로 잎이 제대로 펴져 있다. 찻잎의 크기로 볼 때 중작에 속한다. 이후의 세물차(7월), 끝물차(8월 하순~백로)는 대작 혹은 막차로 불린다.
녹차에는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혈압상승을 억제하는 카테킨과 모세혈관의 저항성을 증가시키는 플라보노이드 등 10여 가지 인체에 좋은 성분이 들어 있다. 노화, 고혈압 및 동맥경화, 당뇨 등의 현대병 예방에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녹차는 우롱차, 철관음 등 중국차와 달리 뜨겁지 않은 물에 우려내야 제 향을 낸다. 특히 찻잎이 작은 고급차일수록 물 온도를 낮춘다. 고급차는 섭씨 50~60도에서 약 150초, 중급차는 60~70도에서 120초 정도 우려낸다. 처음 대하면 ‘너무 식었다’는 느낌이 든다. ‘차는 뜨거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은근한 온도와 은은한 향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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