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29일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중앙상임위원장 백태웅이 구속됨으로써 사노맹 사건이 일단락됐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 할 시인 박노해(본명 박기평)는 그 전해 3월 이미 구속된 상태였다. 시인이 사노맹 안에서 맡은 직책은 중앙상임위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집 '노동의 새벽'(1984)으로 한국 노동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젖힌 박노해와 서울대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출신의 백태웅(필명 이정로)은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민족민주변혁론(ND)에 기초한 급진적 사회·정치 평론을 문예지 '노동해방문학'에 잇달아 발표하며 탈-자본주의 사회를 모색한 바 있다.사노맹은 1980년대 좌파 사회운동권에서 가장 급진적 분파 가운데 하나였던 제헌의회파(CA)의 정치적 침전물이었다.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남한의 사회경제구성체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 파악하고, 노동자 계급이 중심에 선 통일전선 세력의 무장 봉기를 통해 근본적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문학평론가 조정환이 주도한 이들의 문예론은 노동해방문학론으로 불렸다.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가뭇없이 무너져 내려가던 시기에 난데없이 제출된 이 모험주의 노선은 유치했다고 밖에 평가할 수 없겠지만, 기층 민중의 삶에 존엄을 부여하고자 했던 이들의 열정까지 허투루 볼 일은 아니겠다.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 만들어진 최대의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 조직이라고 국가안전기획부가 평가한 사노맹은 박노해와 백태웅의 구속으로 와해됐지만, 그 뒤에도 민중정치연합 소속원 수십 명이 사노맹 관련 혐의로 구속되는 등 사건의 파장은 1994년 말까지 이어졌다. 사노맹 사건 관련자들은 최고 무기 징역까지 선고 받았다가, 1998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박노해·백태웅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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