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그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듯, 미술품 하나는 한 도시의 인상을 바꿔놓는다.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동어의처럼 느껴지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가 본 이라면 그곳에서 사시사철 열리는 박람회의 내용보다 박람회장 앞에 서 있는 조너선 브롭스키의 거대한 철조각 '망치질하는 사람'이 더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브롭스키의 이 조각은 조금 작은 규모로 축소돼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에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환경조형물 혹은 공공조형물은 그래서 미술관이나 화랑 안에 놓인 회화나 조각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작품이 놓인 공간과 함께, 그 공간을 거닐고 지나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 숨쉬는 미술품이다. 가나아트센터가 28일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시작한 '작은 조각―큰 꿈' 전은 도시환경 한 가운데 놓였던 이 공공조형물들을 화랑 안으로 다시 끌어들인 좀 특별하고 재미있는 전시다. 최근 5년간 삼성테스코의 할인점인 홈플러스 전국 29개 매장에 설치된 공공조형물 50여 점을 꼭 같은 형태의 조각 작품으로 축소·재제작해서 한 자리에 모았다.
참여 작가는 40명. 유영교 한진섭 양화선 도흥록 신현중 이불 박성태 박은선 등 유망 작가들이 망라됐다. 형태는 꼭 같은 작품으로 규모만 축소했다지만 작업은 쉽지 않았다. 야외에 설치된 대형 공공조형물을 실내 전시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의미에 대해 작가들과 논의하고, 새 작품을 제작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렸다.
전시작들은 크게 사람들의 이야기, 자연의 아름다움, 미래지향적인 희망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로 대별된다.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한 이불은 '사이보그'의 축소 작품을 내놓았다. 첨단 테크놀로지가 생명에 가하는 유형무형의 영향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담은 작품이다. 모란미술상을 받은 박성태는 스테인레스 구조물 아래 위로 역동적인 인물상 두 점을 배치한 '천지인'에서 힘있는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최근 불의의 사고로 작고한 조각가 구본주는 '맨발의 청춘'에서 3명의 소시민이 정신없이 달려가는 모습을 통해 현대 도시인의 삶을 우화적이면서도 현장감 넘치게 표현했다.
현재 국내 공공조형물은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 신축 시 건축비의 0.7%에 해당하는 비용의 조각이나 그림을 건물 안팎에 설치하도록 규정한 문예진흥법에 의해 제도화돼 있다. 최근 이 법을 개정해 개별 건물마다 환경조형물을 만드는 대신, 건축주가 0.5%의 기금을 내고 이 기금을 공공미술센터가 관리해 공공조형물을 설치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어느 쪽이든, 공공조형물은 도시의 얼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이번 전시는 보여준다. 5월 4일까지 열리는 서울 전에 이어 '작은 조각―큰 꿈'은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부천 홈플러스 문화센터에서 순회전으로 계속된다. 문의 (02)720―1020
/하종오기자 joha@hk.co.kr
■아이디어 낸 이승한 삼성테스코 사장
공공조형물을 축소 제작해 전시하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이승한(58·사진) 삼성테스코 사장이었다. 이 사장은 독특한 예술경영, 문화경영론으로 이미 업계에서 소문난 사람이다.
1999년 삼성테스코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그는 홈플러스 건물 외관은 물론 환경조형물 선정과 설치까지 직접 지휘했다. 건물 설계 단계부터 작가들을 만나 작품의 의미를 듣고, 작품과 외부 조경이 어울리나 따져보고, 작업 현장도 방문했다. 이른바 '1% 법'으로 정해진 건축물 미술장식품 설치 의무에 대한 법 규정을 스스로 뛰어넘어, 부천 상동점에 설치된 이경복 작품의 경우 건축비의 3%에 가까운 비용을 아낌없이 지출했다. "환경조형물 하나로 고객들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고객과 가치를 함께 나누는 점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할인점을 만드는 것이 우리 목표입니다."
삼성 그룹 내에서도 그는 '미술 통'이다. 호암갤러리가 이전하는 한남동 삼성미술관 단지는 이 사장이 마리오 보타 등 세계적인 건축가 4명을 직접 선정해 설계를 맡겼다. 종로 거리의 명물이 된 '종로 타워'로 불리는 삼성생명 건물을 설계할 때의 일화도 재미있다. "규정된 건물 높이, 용적률 제한을 보니 도저히 건물 모양이 안 나겠더라구요. 그래서 두 조건만 충족시키면서 건물 가운데를 뻥 뚫어버렸지요." 홈플러스 매장을 흰색, 빨간색, 파란색 3가지 색상만을 써서 시계탑 모양으로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그의 미술 사랑은 70년대 중반 영국 런던에서 주재원으로 5년간 생활하며 도시와 예술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됐다. 출장 때면 현지에서 산 싼 그림을 둘둘 말아 들고 왔다. 올해 초에는 도시계획학 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인구당 미술관, 박물관의 수가 가장 적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들었습니다. 국민소득 2만 불이 된들 예술과 문화에 바탕한 삶의 질, 의식 수준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그는 "그리고 경영이야말로 한 폭의 그림을 만드는 과정"이라며 웃었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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