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청소년단체협의회가 발족할 때 내가 산파 역할을 한 적이 있다. 그 뒤에 김치묵(金致默) YMCA 회장, 걸스카우트의 양순담(楊順淡) 총재, 대한적십자사의 내 선임자인 김학묵(金學默) 사무총장, 이강혁(李康爀) 유엔학생회(UNSA) 회장, 강문규(姜汶奎) YMCA 총장 등 각 청소년단체 대표들이 회장을 역임했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취임 직후에는 김현옥(金玄玉) 전 서울시장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가 세칭 와우아파트 사건의 책임을 지고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나더러 회장을 맡으라는 의견이 모아졌다.나는 사양했다. 이미 한적을 대표해 김학묵씨가 회장을 했고, 또 청소년운동의 후배들이 두루 회장을 거친 터라 맡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나의 여러 경력과 인간관계 등을 고려하고 당시 시국 형편을 살펴볼 때 내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결국 나를 선출해 회장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됐다. 80년 여름이었다.
취임 후 1년 반쯤 지난 후였다. 전 대통령은 정부 지원 하에 청소년연맹을 발족시키고, 총재에 자신과 가까운 군 출신으로 총무처 장관을 지낸 김용휴(金容烋)씨를 선임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다 청소년연맹의 구윤서(具允瑞) 사무총장이 나를 찾아와서 "대통령의 지시"라면서 "모든 청소년단체는 청소년연맹에 가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 총장은 흥사단 출신이고, 김 총재는 조선민족청년단 시절 경리 일을 본 사람이어서 둘 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청소년단체협의회는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청소년단체협의회(WAY)에 가입해 있는, 자발적인 청소년 단체들의 협의체로 특정 단체에 강제 가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구 총장에게 이를 자세히 설명해 돌려보냈다. 그랬더니 1주일쯤 후에 그가 다시 찾아와 "그 사정을 대통령에게 말했더니 '그러면 청소년연맹도 청소년단체협의회에 가입하는 대신, 청소년연맹 총재가 청소년단체협의회의 책임을 맡도록 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뜻을 청협 사무국에 전해서 회원 단체들의 의견을 물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회원 단체인 각 청소년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어떻게 갑자기 생긴 청소년연맹 총재에게 오랜 전통을 가진 자생적 NGO의 연대기구인 청협 회장을 맡기라고 하는가"라는 비판이었다. 당시 정부는 민주주의나 NGO운동의 특성과 존재 의미는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는, 꽤 강압적인 분위기였다. 나는 김 총재의 입장도 곤란할 것으로 짐작이 돼 그를 만나 회원 단체들을 잘 설득해 합의를 보면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했다.
그 후 두어달 동안 이 문제로 정부와 청협 사이에 많은 진통을 거듭하며 몇 번의 회의를 거친 끝에 김 총재가 회장을 맡게 되었다. 청협은 30여 개의 청소년 단체들이 모여 청소년문제, 청소년운동의 과제와 프로그램, 청소년육성대책 등을 꽤 심도 있게 협의하고 연구하며, 필요한 때 공동전선을 펴기도 하는 NGO기구였는데 이렇게 된 이후에는 일종의 관제적(官製的) 성격을 띠고 그 역할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회에 내가 오랫동안 관여한 청소년운동과 관련해 여러 단체들의 활동을 회상해 본다. 조직과 프로그램이 제일 세련된 곳은 YWCA와 YMCA라고 할 수 있고, 유네스코는 민주시민교육과 국제연대활동 등이 강해 대학생들에게 매력이 있었다.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는 훈련프로그램이 잘돼있어 초·중·고생에게 환영 받았다. 청소년적십자는 박애 봉사 보건 친선이라는 이념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개했고 단원수가 제일 많았다. 도덕재무장운동(MRA)은 제헌의원을 지낸 정준(鄭濬) 선생이 약 30년간 책임을 져온 단체로 숫자는 적지만 열심히 도덕성 함양에 노력했다. 30, 40여년 전에 나와 같이 청소년운동을 하던 분 가운데 특히 보이스카우트의 황광은(黃光恩), YMCA의 김치묵, 걸스카우트의 양순담과 김옥라(金玉羅), MRA의 정준씨 등이 기억에 남는 그리운 얼굴인데 김옥라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타계했다.
/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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