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취임 직후에 본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해체하고 대신 출발시킨 평화통일 자문기구이다. 1981년 이 기구의 헌장을 만들 때 조덕송(趙德松) 조선일보 주필과 통일전문가 강인덕(康仁德)씨 등과 함께 나도 헌장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이 기구는 통일 문제에 관해 대통령에게 자문을 하는 기구인데 자문을 받아야 할 대통령 자신이 의장이 된 것은 지금도 의아하게 생각된다. 실제로는 수석부의장이 총책임을 지고 있었다. 처음 수석부의장은 전 국방장관 주영복(周永福)씨였고, 사무총장은 김창식(金昶植)씨였다.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으로 있던 나는 8개 분과위원회 중 정책심의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됐으나 스스로 적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수석부의장도 좀 더 신망 있고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었어야 했다. 경제분과위원회는 LG그룹회장 구자경(具滋璟)씨, 종교분과위원회는 조향록(趙香祿) 목사, 남북관계분과위원회는 강인덕씨가 위원장이었다. 정책심의분과위원회는 김점곤(金點坤) 장군, 김철수(金哲洙) 서울대 교수, 배명인(裵命仁) 전 법무장관, 백낙환(白樂晥) 인제대 의료원장, 백선엽(白善燁) 장군, 이경숙(李慶淑) 숙명여대 교수, 이홍구(李洪九) 서울대 교수, 최경록(崔慶祿) 장군, 조영식(趙永植) 경희대 총장, 재야원로 송남헌(宋南憲)씨 등 비교적 비중있는 인물 약 40명으로 구성됐고, 남북통일정책 심의라는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는 활동이 비교적 활발해서 2개월에 한번쯤은 회의를 열어 정부의 보고도 받고, 토론도 했다. 그러나 정부에서 이미 중요한 정책 과제들을 다 결정한 이후에 우리에게 와서 브리핑을 해주는 것이었으므로 자문이라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다고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점이 위원장을 맡은 나로서는 평소에 불만스러웠다.
84년 어느날 전 대통령이 각 분과위원장과 부의장 등 18명을 청와대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전 대통령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보다 자신의 말씀을 많이 하는 다변가라, 두어 시간에 걸친 오찬과 대화를 하는 자리에서 거의 혼자 얘기했다. 대통령의 말만 들은 뒤 밥만 먹고 나올 형편이 됐다. 그래서 나는 회동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대통령에게 "한 말씀 드리겠다"고 청한 뒤 "이 기구가 헌법기관이요, 영향력 있는 인사 1만여 명이 참여해 구성된 통일정책 자문기관인데 실제로 주요 정책이나 과제를 제대로 자문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중요한 통일정책은 미리 과제들을 주어 연구하고 자문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평소의 생각을 말했다. 참석자들이 긴장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대통령은 성격이 활달해서 그런지 흔쾌히 "아 그렇습니까. 여기 남북회담 다니고, 남북문제 연구한 전문가들이 많은데 자문을 제대로 해야지요"하면서 비서실장을 불러 "안기부장과 통일부 장관에게 연락해서 앞으로는 통일정책 자문을 심도 있게 받으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물러 나와 버스를 타니 모두들 "서 총장이 역시 다르다, 잘했다"고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서 내 말을 좀 거들지 왜 못했느냐. 앞으로 직접 건의할 일은 하자"고 해서 끝낸 적이 있다. 전 대통령이 말은 그렇게 시원하게 했지만 그 뒤에도 별로 바뀐 것은 없었다.
84년 마포에서부터 한강 하류 일대까지 큰 홍수가 났다. 그 때 북한이 쌀 5만석과 시멘트 10만톤 등을 구호품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정부에서 이 일과 관련해 민주평통에 자문을 구해왔다. 나를 비롯해 정책심의위원회 위원들은 그걸 다 받으면 부담되고 북측도 넉넉치 못하니 한 1만석만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남북회담 사무국에서는 "북한이 말로만 그러지 실제로는 못 보낼 것"이라며 "주면 다 받겠다고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실제로 약속한 양의 구호물자를 보냈다. 어쨌든 민주평통이 당초 설치 목적대로 남북관계, 평화통일 정책 자문이라는 제 역할을 다하고, 남북간의 여러 회담에도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서영훈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