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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손끝-한국의 장인들]<13> 현악기 장인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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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손끝-한국의 장인들]<13> 현악기 장인 김동인

입력
2004.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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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서른다섯살. 그는 그러나 한국에 있는 유일한 현악기 제작 마이스터이다. 장인이 아니라 마이스터라고 부른 것은 그가 독일 장인, 즉 마이스터 자격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그는 2001년에 폴란드 비에니아프스키(Wieniawski) 현악기 제작경연대회에서 10위에 올랐다.

김동인(35·스트라디 현악기 공방)씨. 그는 이탈리아의 크레모나와 더불어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학교로 손꼽히는 독일 미텐발트 바이올린 학교를 나왔다. 독일 남부의 미텐발트에 있는 이 학교의 정확한 이름은 국립 바이올린제작직업전문학교. 3년반 과정에 정원이 30명 남짓인데 세계적인 바이올린 학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입학이 어렵다.

기본적으로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직업학교이면서도 대학입학 자격시험(아비투어)에 통과해야 응시할 수 있다. 시험과목은 악기연주와 목공, 제도로 나뉘는데 즉석에서 바이올린의 목 부분(스크롤)을 보고 실물크기대로 제도해야 하는가 하면 직육면체에 가까운 나무토막을 직각자와 줄만으로 정육면체로 만들어야 한다. 악기 연주 역시 심사위원 앞에서 해야 한다.

김씨가 입학한 1993년에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500여명 가운데 추려진 40여명이 이 같은 시험을 거친 끝에 7명만 선발됐다. 매년 입학생은 이 정도. 이 나마도 성적순으로 절반만 9월 학기에 입학하고 나머지는 이듬해 2월에 입학한다. 김씨는 4등으로 입학해 그 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님 밑에서 1년간 바이올린 제작과정을 훈련한 것이 많이 도움이 됐습니다." 김씨의 아버지는 한국 바이올린 제작가협회 회장인 김현주(64)씨이다.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바이올린 수리가 전문이었지만 수제 바이올린도 만들고 있었다.

김씨는 어려서 첼로를 했다. 대학은 경원대 경제학과를 갔는데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현악기를 만들겠다고 나섰지만 아버지는 "군대 갔다 와서 생각해보자"고 말렸다. 대학 2학년을 중퇴하고 군대 3년을 복무하는 동안에도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제사 허락을 해주셨다.

미텐발트 바이올린 학교는 입학도 쉽지 않았지만 수업도 쉽지 않았다. 날카로운 칼을 쓰다가 부상을 입고 중퇴하는 학생도 생겨났고 정교한 제작과정을 따라가지 못해 20% 정도는 유급이 된다.

현악기는 가문비나무(윗판) 단풍나무(아랫판과 옆판, 손잡이, 줄받침) 흑단(턱받침, 지판) 등의 나무와 줄을 연결해 소리를 내는 장치이다. 불룩한 몸통은 평면의 나무를 일일이 조각도와 대패로 깎아서 만들어낸다. 몸통은 좌와 우가 균형이 맞아야 악기로서 역할을 한다. 몸통의 배부른 정도는 물론 f자 구멍이나 줄받침의 위치, 공명통 안에 넣는 베이스바와 사운드포스트의 위치와 강약에 따라서도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미텐발트 학교는 재학생들이 만든 악기가 외국으로 팔려나갈 정도로 명성을 인정받고 있는 만큼 학사관리가 엄격하다. 학비와 재료비가 완전 무료인 대신 3년동안 제대로 된 악기를 7개 만들어야 한다. 이 7개를 채운 사람에게만 한 개를 더 만들어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때는 바이올린이나 비올라가 아닌 첼로나 바로크 악기 같은 것에도 도전하게 해준다. 김씨는 7개를 다 만든 덕분에 첼로를 하나 더 만들어보고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씨는 "학교만 졸업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학교 졸업후 마이스터에게 3년간 도제식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서 "진짜 바이올린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의 스승은 세계적인 현악기 명장으로 손꼽히는 조세프 칸투샤(Joseph Kantuscher·80)씨이다. 97년 2월 학교를 졸업하고 칸투샤씨를 찾았지만 반응은 떨떠름했다. '손도 아프고 이제는 쉬어야 하니 도제를 받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 김씨의 공부를 적극 격려하던 현악기 애호가 송진호(송우무역 대표)씨가 칸투샤씨의 현악기를 주문하면서 교분을 틔워주어 도제가 가능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일 정부가 발목을 잡았다. 도제를 하려면 취업비자를 얻어야 하는데 '도제 안 해도 당신네 나라에 가서는 바이올린 만들 수 있는데 왜 굳이 하려는 것이냐'고 허가해주지 않았다. 장인 제도가 없는 나라에서 온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그냥 제 나라로 돌아가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그 나라에 가서 교육을 받는다면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싶었다." 결국에는 스승이 노동부에 있는 지인을 움직여 취업비자를 받아주었다.

김씨는 칸투샤씨 밑에서 "목 디스크가 생기도록" 현악기만 만들었다. 불과 3년 동안 첼로 4대를 포함, 35대 정도의 악기를 만들었으니 쉴 새 없이 일했다고 보면 된다.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반까지 쉬는 시간은 점심 시간 1시간과 차 마시는 시간 15분 뿐이었다. 그는 "도제로 들어간 6개월만에 인간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스승이 가장 강조한 것은 "생각하면서 일하라." 손끝만 놀려서는 제대로 된 장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현악기 제작 기법 가운데는 칸투샤형이 따로 있다. 바로 통의 옆판 안쪽의 위와 아래에 나무선(라이닝)을 한 줄 더 대는 것이다. 원래 콘트라베이스의 지판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통에 힘을 주기 위해 88년에 도입했더니 좋아서 점차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에도 도입해서 쓰고 있다. 또 현악기 틀(몰드)을 통으로 만들지 않고 6개의 조각으로 만들어 나중에 빼기 쉽게 만든 것도 칸투샤의 창안이다.

또 학교에서는 통판이 대칭을 이루도록 기계적으로 가르치지만 도제 수업을 받으면서 판의 모양을 대칭이 되게 깎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균형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무가 좀더 묵직하면 더 깎아주어서 무게를 일정하게 해야 소리도 일정하게 난다는 것도 도제식 교육에서 배웠다. 재료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는 융통성을 익힌 셈이다.

무엇보다도 칠에 관한 교육은 도제시절 비로소 이뤄졌다. 칠은 악기 소리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지만 칠의 구성성분은 제자한테도 안 가르쳐주는 비전(秘傳)이다.

칠은 용해제를 무엇으로 쓰느냐에 따라 크게 알코올칠과 기름칠로 나뉜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알코올칠인데 빨리 말라서 다음 과정을 가르치는데 간편하다. 그런데 알코올칠은 마른 후 너무 딱딱해진다. 반면 기름칠은 건조 후에도 부드럽다. 일부를 벗겨내다보면 "칠이 치즈처럼 부드럽게 밀려간다." 딱딱한 소재는 소리를 풍성하게 하는 데는 장애이다. 그래서 김씨는 악기를 제대로 만들려면 알코올칠보다는 기름칠이 낫다고 확신하고 있다.

2000년 2월에 그는 마이스터 시험을 치렀다. 부기 조세법 같은 제세규정과 청소년 관련법, 심리학 같은 분야도 시험과목에 들어있다. 무엇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악기를 수리하는가를 보고, 20일 정도의 시간을 주어 감독관이 현장에 나와 직접 악기를 만들어보게 한다. 만들어진 악기는 다시 똑같이 제도를 하게 해서 일치하는가를 심사한다. 이 시험을 한번에 통과하고 김씨는 마이스터 자격증을 얻었다.

흔히들 악기는 처음에는 소리가 잘 나지 않고 좀 묵어야 소리가 난다고들 하지만 김씨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무는 오래된 것을 써야 하지만 장인이 제대로 만져서 만들면 만드는 즉시 제대로 된 소리가 난다"고 했다.

김씨는 2000년 3월에 귀국한 후 아버지의 공방을 공동작업실로 꾸몄다. 지금까지 현악기 30여대를 만들었다. 2001년에는 4년마다 열리는 미텐발트 현악기제작경연에서도 본선에 올랐다.

김씨가 만든 바이올린은 청주시향 악장인 손강지씨가 쓰고 있다. 그는 "한때는 내가 만든 악기가 좋은 현악기를 가진 이들의 세컨드 악기(보조 악기)이길 바랐으나 이제는 가능성 있는 학생의 유일한 악기이길 바라게 됐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음악대학과 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이 그의 악기를 유일한 악기로 쓰고 있다.

그는 김동인 바이올린을 통해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현악기가 나올 날을 앞당기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

/서화숙 편집위원 chanbundir@hotmail.com

● 한국바이올린제작가협회

현악기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만든 한국바이올린제작가협회가 있다. 1992년 창립해 현재 회원은 35명.

협회에서는 수제 현악기가 등장한 때를 70년대 쯤으로 꼽는다. 공장제 바이올린을 만들던 이들이 눈대중을 바탕으로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80년대 들어 미국 시카고바이올린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수제 바이올린 시대가 열렸다.

시카고바이올린학교는 미텐발트 출신의 마이스터인 재미교포 이주호(72)씨가 74년 창립한 학교.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현악기제작학교로 꼽힌다.

바이올린제작가협회 회장을 지낸 김성상(71)씨가 1회 졸업생이다. 연세대에서 교회음악을 전공하고 미국에 유학갔던 김성상씨는 이씨에게 바이올린 만드는 법을 배우자고 해서 학교가 만들어지는데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한 주인공. 재학중인 76년에 만든 비올라는 미국독립200주년 기념 현악기경연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에서 명장들을 사사한 김성상씨는 85년 귀국,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바이올린 제작학교를 만들었다. 김성상씨의 초기 제자인 전훈주(33)씨는 김동인씨와 더불어 가장 활발하게 현악기를 제작하는 이로 꼽힌다.

국내에는 이 시카고바이올린학교 출신들과 이탈리아 크레모나바이올린학교 출신, 김성상씨의 학교 출신이 장인군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국산 명품보다는 정체불명의 외국산을 선호하는 분위기 때문에 악기 제작보다는 수리에 치중하고 있다.

한국바이올린제작가협회에서는 매년 제작 작품 전시회를 갖는다. 올해는 9월에 부산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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