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전화벨 소리가 요란하다. "이모, 나야 용승이!" "오, 우리 똘똘이 웬일이야?""응, 나 전교 부회장에 당선됐어." "그래? 아이구, 우리 용승이 축하하네…." 전화를 끊고 뿌듯한 기분에 이제는 아득해진 일이 주마등 같이 스쳐갔다.지금 용승이가 초등학교 5학년. 그러니까 꼭 12년 전 일이다. 7월의 뜨거운 태양 빛에 길거리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약국을 경영하는 약사로서 지루한 하품만 길게 하고 있는데 충북 괴산 사는 여동생이 불쑥 나타났다. "웬일이니?""응…."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딸만 둘인 동생은 남편이 독자라서 셋째는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임신인 것 같아 반가운 마음으로 청주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진찰을 받고 오는 중이란다. 그런데 자궁에 물혹이 생겨서 산모에게도 태아에게도 위험하니 아예 유산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의사가 권유해 피검사까지 하고 왔다는 것이다.
입덧에 신경까지 예민해진 동생의 모습이 참 안돼 보였다. 동생이 2층으로 쉬러 간 사이 답답한 마음에 멍하니 약국 밖으로 보이는 7월의 뭉게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님 앉는 긴 의자 쪽에서 다급한 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무슨 소리일까 하고 어리둥절해진 나에게 외마디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살려 달라니까요….'
갑자기 들은 소리라 밖에서 애들이 싸우는 소리인가 보다 하고 본능적으로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2층 TV에서 나는 소리인가 하고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보니 TV는 꺼져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여동생 뱃속에 든 아이가 한 말은 아닐까? 꼭 그럴 것 같았다.
유산을 여러 번 경험한 친정 어머니는 막내딸 건강이 먼저 걱정인지 강력하게 유산을 종용했다.
쉬고 있는 여동생을 깨워 어서 빨리 괴산으로 가라고 했다. 여기 있다가는 내일이라도 당장 유산을 시킬 것 같아서였다.
무조건 눈에 안보여야 생각할 여유라도 있을 것 같았다. 여동생에게 조금 전 겪은 일을 얘기하고 택시를 대절시켜 태웠다. 여동생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택시에 몸을 실었다.
난 그 후 한 달 동안 물혹을 없애고 건강한 아들을 주십사 하고 신께 기도 드렸다. 여러 가지 긴장되는 일은 있었지만 동생은 무사히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오늘 부회장으로 당선됐다고 자랑 전화를 한 조카 용승이인 것이다. 학교에서 배구선수까지 하는 용승이의 목소리는 그 때 살려달라고 하던 톤이 높은 아기 목소리와 어쩌면 그렇게 꼭 닮았는지 모른다.
그 목소리는 동생과 내게는 기적의 소리였다.
/이진순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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