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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31>동남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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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31>동남도서

입력
200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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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조금의 성의라도 있다면 아무리 난리 속이라도 반드시 진보할 수 있는 법이다. 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 어째서 스스로 포기 하려고 하려느냐. …율곡과 같은 분은 어버이를 일찍 여의고 그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지극한 도를 깨쳤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63)은 귀향지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를 통해 사람의 도리를 일깨우려고 했다. 다산은 무엇보다 독서를 권장했다. 책 속에 길이 있음을 거듭 설파했다. 다산은 책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혼의 결정체로 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책은 사람을 바꾼다. 더 나아가 사회를 변혁시킨다.

'동남도서'는 광복 후 우리사회의 지적 갈증을 달래준 지식무역의 원조다. 53년 도서수입업자 1호로 등록한 동남도서는 1·4 후퇴 때 북한에서 부산으로 피란해온 고 홍구선(洪球善·82년 59세로 타계)옹이 창업했다. '지식입국(知識立國)'의 포부를 지니고 있던 그는 외국의 선진문물을 가장 빨리 습득할 수 있는 수단이 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식무역의 대상국으로 그는 일본을 선택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그는 일본어에 능통했다. 창업당시 상호는 동방도서였다. 홍옹은 2년 뒤 사업의 본거지를 서울로 옮기면서 상호를 고려사에 이어 동남도서로 다시 변경했다.

선진국을 향해 줄달음쳐 가던 50, 60년대 일본의 변화와 발전은 우리의 모델이 됐고 일본 출판물에 대한 국내의 관심도 높아 갔다. 그 무렵 일본어를 이해하고 있던 세대가 지식사회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홍옹은 62년 국내 최초로 요미우리(讀賣)와 아사히(朝日)신문의 한국배포권을 획득했다. 회사성장에 크게 기여한 두 신문에 대한 배포권은 70년대 초 다른 업체로 넘어갔다. 홍옹은 광복 전까지 고향(함남 홍원)을 중심으로 수산물유통사업을 벌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동남도서는 우리 문화와 경제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특히 50, 60년대 국내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선진지식과 정보를 앞장서서 소개했습니다." 2대 사장 승백(承伯·50)씨는 동남도서의 역할을 당당하게 평가한다. 은행에 근무하던 그는 부친의 타계 직전 가업을 계승했다. 승백씨는 93년 창업 40주년을 맞아 상호의 한자를 東南에서 東楠으로 변경했다. 부친의 유지를 잊지 않고 동남을 더욱 번창시키겠다는 각오를 상호에 담은 것이다.

일본출판물 수입전문업체로 출발한 동남도서의 발자취는 우리 사회의 지적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60년대까지 일본서적 중심이었던 동남도서의 수입구조는 70년대이후 미국을 비롯한 구미서적으로 확대된다. 동남도서는 사업영역을 범세계적으로 확장했지만 여전히 일본출판계의 가장 큰 고객이다. 독점판매권을 갖고 있던 문예춘추(文藝春秋)는 수입자율화 전까지 매달 1만부 정도 들여왔다. 일본의 패션잡지 '논노', 영화잡지 '로드쇼' '스크린' 등은 매달 2,000∼3,000부씩 나갔다. 동남도서와 거래하는 해외출판사도 미국 일본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15개국 250여개 사에 이른다. 미국의 하퍼, 영국의 테임즈& 허드슨, 페이든 등 유명출판사는 동남도서를 우수고객으로 평가한다. 일본은 주로 동경출판판매와 일본출판판매를 통해 거래한다.

동남도서가 수입하는 출판물 중 각종 정기간행물, 학술전문지만 한 해 평균 5,000 종에 이른다. 단행본으로 대표되는 일반도서는 3,000종 안팎이다. 학술지는 한 종에 10권 미만 팔리는 게 보통이다. 2000년대 들어 디자인과 건축분야의 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좋은 책은 2,000∼3,000권 정도의 수요가 있다. 스페인의 저명한 출판사 악타(Actar)에서 출간한 한 건축사전은 교수와 학생들의 필독서로 인정을 받았다.

일본도서의 수요는 점차 감소추세에 있다. 50년대 이후 국내의 지적 지향이 미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6대4의 비율로 구미출판물 비중이 크다. 책의 선택은 주로 국제적인 도서전시회를 통해 이뤄진다. 스페인의 건축사전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발굴한 것이다. 수요 파악을 위해서는 늘 국내 학계의 동향은 물론 경제상황에도 민감해야 한다. 변화와 관심의 방향을 미리 포착, 시장조사를 한 뒤 이에 걸맞은 책을 찾아나선다. 국내 수요가 오히려 유럽 전체보다 큰 책도 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출판사 아키볼토에서 나온 실내장식책(Lofts)이 그런 종류로 유럽전역의 배가 넘는 2,000권이나 팔렸다.

창업반세기를 넘긴 동남도서는 수출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창업자 시절에도 한동안 국내도서를 수출하기도 했다. 올해 오랫동안 중단해온 수출을 재개했다. 세계 주요 기업들의 회사마크와 상표 등을 모은 'World Trademarks'(권영수 신라대교수)를 중국 미국 일본 유럽 등에 6,000권 가까이 수출했다.

IMF환란은 동남도서의 창업이래 가장 큰 위기였다. 외국서적 수입업체는 환차손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동남도서도 이를 비켜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워낙 신용이 단단한 회사로 인정받은 덕분에 상대적으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지금도 동남도서는 영국의 페이든을 비롯한 유수한 출판사들이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는 으뜸 고객이다. 책은 문화교류의 통로다. 동남도서는 그동안 쌓아올린 신용을 바탕으로 지식무역의 폭을 더욱 넓혀갈 생각이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창업자 故홍구선 옹 국내전자산업의 선구자

"그래 광고를 내자." 일본유수의 전자업체 대표와의 면담에 실패한 청년사업가 홍구선의 머리에 이런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60년대 초 전자산업의 미래를 확신한 그는 일본의 한 전자회사를 합작파트너로 정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자신의 포부와 사업계획을 설명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신문에 광고를 낸 뒤 그의 인터뷰기사가 실렸고 결국 면담에 성공했다. 홍옹 곁에서 일을 배웠던 박용우(朴用雨·사업)씨의 회고다.

지식무역의 물꼬를 튼 그는 국내 전자산업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64년 동남전기를 세워 라디오와 전축을 생산한데 이어 3년 뒤 동남전자를 설립, 국내 최초로 TV를 생산·판매했다. 동남전자는 뒤에 대우가 인수, 대우전자의 모태로 삼았다.

김우중씨의 '대우신화'는 67년 명동 동남도서빌딩의 한 사무실에서 그 싹이 텄다. 동남도서빌딩에는 현재 동남도서의 자회사인 동남도서판매가 있다. 홍옹은 박정희대통령 시절 마산수출자유지역 유치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거기에 전자부품을 만드는 한국동광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종업원만 5,000명에 달했다. 국내에 라면이 생산되기 전에 라면업과 택배시스템 구축도 그의 사업계획에 들어 있었다. 홍옹은 동남도서는 물론이고 다른 사업체의 대리점이나 판매점 입지를 선정할 때도 세심한 신경을 썼다. 본인이 직접 후보지역에 나가 아침 점심 저녁 등 하루 세 차례씩 유동인구를 파악했다.

동남도서의 창업자 홍구선옹은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그와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 능력은 독서를 통해 배양됐다. 늘 책을 가까이 했고 특히 매일 새벽 국내외 신문 10여 종을 정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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