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가 분명한 서사 구조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매우 낯설고 불편할 것이다.생전 처음 맞닥뜨린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낯설음이 아니라, 익히 알고 있는 존재가 다르게 다가올 때 느끼는 공포에 가까운 낯설음이다.
오랜 만에 다시 만난 두 남자가 과거에 함께 알았던 여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 이 단순한 설정. 그러나 속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특히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막을 내린 결말이나, 엉뚱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의 언행은 관객을 몹시 당황스럽게 만든다. 마치 종이를 자르는 가위가 어느날 갑자기 흉기로 돌변한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여자들은 가위 같다. 이런 여자들이야말로 영화 속의 돌발적인 상황에서 쉽게 흉기로 돌변한다.
약속 시간에 왜 늦었냐고 힐난하는 헌준(김태우)에게 선화(성현아)는 서슴지 않고 "어제 강간을 당했다"는 엉뚱한 고백을 한다. 대학 강사인 문호(유지태)가 여관에 들어가 방이 더러워 앉기도 싫다고 불평하자 함께 간 여자 제자는 "그럼 빨아주겠다"는 당돌한 제안을 한다. 남자는 예기치 못한 여자의 반응에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즐거워 한다. 어느 순간 남자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가슴을 찌르는 흉기인 여자들.
이같은 섬뜩하고 생경한 느낌은 영상에서도 나타난다. 등장인물들이 마주 앉아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7분여 동안 대화를 주고 받는 롱테이크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빠른 화면 전환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래도 꾹 참고 주의 깊게 들어보면, 인내심에 대한 보상으로 엉뚱하게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교묘하게 현실을 비꼰 유머와 풍자를 발견할 수 있다.
'오! 수정' '생활의 발견' 등 전작처럼 성에 대한 홍 감독의 비틀기식 해석은 여전하다. 헌준은 강간을 당한 선화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여관에 데려가 손수 비누칠을 해서 목욕을 시킨 다음 관계를 갖는다. 선화는 정말 깨끗해질 수 있는거냐고 연신 되물으며 헌준에게 몸을 맡긴다. 희석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이 땅의 남녀를 옥죄고 있는 정조관념을 비웃는 듯한 언행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우선 성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일상성에 파고든 이 영화에서 관객이 제목처럼 '여자가 남자의 미래'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지. 그만큼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모호하다.
또 다른 의문은 칸영화제에서 경쟁부문에 초청할 만큼 반한 이 작품의 매력이 무엇일까. 사실 이 작품은 인물들의 반짝이는 대화가 매력인데, 유럽 사람들이 과연 그 묘미를 제대로 이해할지. 그런 점에서 홍상수 영화는 아직도 우리 영화계의 숙제요, 끝없는 질문의 대상이다. 18세관람가. 5월5일 개봉.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 홍감독 인터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홍상수(43·사진) 감독의 다섯번째 작품. 그 가운데 이번 작품을 포함해 '강원도의 힘' '오! 수정' 등 3편이 칸영화제에 초청 받았다. 그만큼 칸이 일상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솔직히 까발리고 조롱하는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증거. 그의 영화는 칸 용인 셈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황금종려상이 걸린 경쟁부문 초청인 만큼 의미가 남다르다.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 소감은.
"특별한 느낌은 없다. 다만 앞으로 영화를 만들 때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목의 의미를 작품 속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제목은 어떤 이유로 붙였는가.
"제목과 내용은 별개다. 루이 아라공의 '미래의 시'라는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어느날 이 구절을 혼자서 곱씹어보니 뚜렷한 의미는 찾을 수 없었지만 재미있었다. 이런 막연한 느낌이 좋아서 제목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여자, 남자, 미래라는 세 단어가 내게 뚜렷하게 각인된 것은 아니었다. 영화 결말 부분에서 뚜렷한 메시지가 발견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홍 감독의 영화는 독특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특별한 방식이 있는가.
"꼭 처음 의도대로만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다. 중심이 되는 상황을 설정하고, 장면에 어울리는 영감이 떠오르면 해당 부분을 촬영한다. 이렇게 모인 조각 그림을 나중에 편집할 때 줄거리에 따라 짜맞추고 필요없는 부분은 버린다. 그래서 초기 발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화마다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는 이유가 있는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전에 작업을 함께 한 배우들에게도 출연 제의를 했는데, 사정상 출연이 여의치 못했다. 그때그때 작품에 맞는다면 고루 기용할 생각이다."
-평가에 비해 늘 흥행이 모자랐다. 부담은 없는지.
"들어간 돈에 비해 관객 수가 항상 모자랐다. 정 안되면 디지털 카메라를 동원해서라도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어쨌든 작품을 하는 동안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는 35㎜필름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랄 뿐이다."
/최연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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