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탁영호(43)가 선배와 장거리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차 안에서 잡담을 나누다 이야기가 전쟁으로 넘어갔다. 다시 죽음을 앞둔 군인의 광기로 이야기를 전환하는 순간, 국도변 간이 휴게소가 나타났다.차가 멈추자마자 그는 메모장을 꺼내 이렇게 썼다.
'전쟁, 인간의 광기, 죽음, 환각'
구체적 사건과 인물, 주제를 생각하며 전쟁 서적과 사진집을 뒤지다 일본군 위안부를 떠올렸다. 서점에서 위안부 관련서적을 사고, 스크랩 자료를 읽으며 스토리 구상을 시작했다. 주제는 자연스럽게 나왔다. 전쟁의 비극과 조선 여성의 명예회복 및 보상 그리고 굴절된 역사에 대한 반성과 극복이 그것이었다. 단편 '마르스와 조센삐'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단편만화를 위한 탁선생의 강의노트'(황매 발행·1만8,000원)는 구체적 작품을 가지고 소재 찾기에서 콘티 제작, 데생, 그림 연출까지 만화그리기 과정을 소개하는 탁영호의 만화제작방법서이다.
주제의식, 완성도 모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저자는 '단편만화…'에서 설명은 줄이고 사례는 많이 넣었다.
그는 소재 찾기 다음 단계로 주제 잡기를 정했다. 그는 주제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극의 핵심'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주제 정하기 역시 발단은 단순하다. 저자가 보여주는 사례는 이랬다. 어느날 TV를 켰더니 정치인들이 나와 한참동안 떠들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잠시 껐다가 다시 켰더니 아직도 같은 화면이 나왔다. 그 순간 저자는 정치에 대해, 민주주의와 국민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메모장에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가 이끌고 가는 가장 합리적인 정치형태이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정치 무관심은 스스로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한 중범죄이다' 라고 썼다. '컴의 반란'은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국민의 무관심과 낮은 정치의식, 정치인의 부패와 타락. 그래서 대통령은 슈퍼 컴퓨터가 선출한다. 국민 개개인의 지식, 철학, 성격, 재산, 사생활 등을 분석해 대통령을 뽑는 것이다. 그런 정보는 이미 입력돼 있으니 어려울 게 없다.
어느날 대통령이 죽고 슈퍼 컴퓨터가 새 대통령을 선출한다. 그러나 뭐가 잘못됐는지 건달 출신이다. 국민이 어이없어 하는 가운데 대통령은 비밀경찰을 만들고, 원로회의를 봉쇄하며, 심야통행 금지령을 내리더니, 마침내 헌법을 고쳐 종신대통령에 취임한다.
슈퍼 컴퓨터는 개헌에 반대했다가 분해돼 창고로 버려진다. 컴퓨터는 억울했던지 창고에 온 평범한 시민에게 유언을 남긴다. "모든 판단과 결과를 기계와 몇몇 위정자에게 맡기고 국민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갇혀 살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데생을 잘하려면 사물의 생김새를 기억하고 현장 취재로 사실성을 높이며 정밀 묘사로 질감과 명암, 원근의 감각을 익히도록 주문하고 있다. 그림자의 길이와 위치에 따른 공간, 시간 표현법 등 그림 그리기 요령도 들어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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