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산병원 외과 박광민 교수(45)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오늘 간암 수술이 정말 잘 됐다"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스물 몇밖에 안 된 젊은 여자가 지방 병원에서 수술이 어렵다는 진단을 받고 올라왔어요. 낙관적이진 않았죠. 하지만 그냥 포기할 순 없잖아요. 그런데 정말 운 좋게도 절제가 깨끗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그는 의사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수술과정을 "요렇게 요렇게…"하면서 허공에 그려댔다.환자는 박 교수로부터 암 수술을 받고 한 식구가 돼 버린 A씨가 소개한 고향 사람이었다. A씨는 6년 전 수술을 받은 뒤 틈만 나면 쌀이며 참기름을 들고 와 안부를 묻는 등 말 그대로 한 식구였다. 박 교수는 "A씨처럼 한 평생 함께 갈 그런 환자가 또 한명 생긴 것 아니겠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박 교수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1년차 레지던트가 또 나갔다"며 혀를 찼다. 올해 3명째란다. 간 수술 전문의로 이 병원에서 13년째 재직중인 박 교수는 외과의사가 된 것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수술현장에서 그는 가장 극적인 삶의 순간을 목격하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곤 한다.
그가 기억하는 환자 중엔 간을 기증하려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구한 B씨가 있다. 4년 전 24세 어린 직장여성이었던 B씨는 직장 상사의 부인이 간경화로 쓰러질 위기에 처하자 자진해서 간을 주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정밀검사에서 B씨에게 간암이 발견됐다. 자칫 그의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 직장 상사의 부인은 간을 받지 못하게 됐지만 B씨의 마음씀씀이에 이미 감동한 터라 B씨의 암 수술비까지 모두 대주었다. 자신은 다행히 뇌사자의 간을 이식받았고 둘 다 완쾌해 잘 살고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재혼한 C씨는 아내로부터 간을 이식받기로 했으나 흔히 그렇듯 남자 환자가 여자 기증자로부터 받는 간은 크기가 부족해 수술이 어렵다. C씨는 어렵사리 헤어진 전처에게 부탁을 했고 2명의 간을 함께 이식받았다. 헤어진 감정이 좋지 않았을 전처는 하지만 "아이들에겐 아빠가 필요하다"며 수술실로 향했다. 말 그대로 생살을 떼어내는 아픔을 함께 겪은 전처와 후처는 나란히 손을 잡고 퇴원했다.
극적으로 제2의 인생을 얻은 이들은 대부분 이전과 다른 삶을 산다. 하지만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북한에서 귀순한 고 이웅평씨의 경우가 그렇다. 1997년 말기 간경화였던 그는 악 조건에도 불구하고 간 이식을 받아 회생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나 거부반응으로 숨졌다. 장기이식은 1년만 지나면 성공으로 보는 만큼 5년 후 사망은 수술 후유증으로 보긴 어렵다. 박 교수는 "이씨는 정신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였고 스스로 면역억제제를 먹지 않아 거부반응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구하는 데에는 의술이나 기증자의 선의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강인한 정신이 중요한 셈이다.
박 교수가 가장 숙연해지는 순간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환자들을 볼 때다.
간내 담도암으로 수술을 받은 56세 D씨는 5년이 지나도록 별탈이 없어 치료를 완전 종료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검사에서 암이 퍼진 것이 밝혀졌다. 결국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말을 꺼낸 박 교수에게 D씨는 "지난 5년의 삶은 나에게 후회할 바 없이 보람찬 생애였다"며 흔쾌히 돌아섰다. 박 교수는 "그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서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을 느끼기도 하고, 삶을 관조하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고 말한다.
암이 재발한 할머니 환자에게 괜히 미안해서 "사고로 제가 먼저 죽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을 때도 "더 많은 사람을 살려야지, 그런 소리 하면 쓰나"라는 말을 듣고 박 교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환자와 더불어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박 교수는 "산 사람의 간 기증을 활성화할 현실적인 방안을 공론화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장기매매, 물론 불법이죠. 하지만 현실이 어떤지 아십니까. 사형수를 비롯해 300∼500명의 뇌사자 장기이식이 이뤄지는 중국으로 이식수술을 받으러 갑니다. 우리 병원에서 한 해 200명이 간 이식을 받는데 대기자는 400명이나 됩니다. 뇌사자만 기다리다 죽어가는 환자들 천지죠. 그러니 간 기증자에겐 군 면제 이상의 혜택이 주어져야 할 것 아닙니까."
간 이식은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이다. 그리고 T자를 거꾸로 한 흉터를 배에 남긴다. 하지만 잘린 간은 6개월 내에 정상 크기로 다시 자라고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은 사례는 아직 없다. 그 대가는 한 명의 목숨이다.
박 교수는 말했다. "역T자의 상처는 평생 몸에 새겨져 있을 아름다운 훈장입니다. 한 생명을 살린 그 영광의 상처를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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