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가정의 중심이 잡혀야 삶이 흔들리지 않는 법. 가정이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은 대개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일 것이고, 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야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맞벌이를 하는 집이 아니라면) 남편들은 늘 피곤한 바깥일을 핑계대기 마련이고, 아내들은 살림의 어려움을 도통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남편이 그저 야속할 뿐일 테니. 그럼 역할을 한번 바꿔보면 어떨까. 왜 정신분석이나 심리치료에도 서로의 입장을 바꿔보는 역할극이 유용하듯.차영회(車榮會·45)씨 부부는 실제로 8년 전부터 통상의 부부 역할을 바꿔 살아오고 있는 케이스다. 아내(39)가 '피곤한' 직장생활을 하고, 차씨는 대신 '어려운' 집안 살림을 맡아오고 있다. 아내들이 투정을 한들 그게 바깥 일의 중요함과 고단함을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부관계에서 번번이 문제가 되는 것은 더 많은 남편들이 아내의 가사노동을 가볍게 치부해버리기 때문일 터. 차씨의 전업 主夫(婦가 아니다) 경험기는 그래서 한번 들어볼 만하다. 마침 곧 5월은 가정의 달이니.
먼저 차영회씨의 일과부터 보자.
그는 새벽 4시30분이면 잠자리를 떨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인근 교회에 가 새벽기도를 드리고 아침운동을 한다. 집에 오면 6시30분. 이때부터는 아침준비다. 쌀 씻어 밥을 안치고 반찬을 준비하고는 남매를 깨운다.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딸이야 크게 신경 쓸 것 없지만 초등 5학년 아들은 준비물들을 꼼꼼하게 봐줘야 한다. 요즘 초등학교에선 뭐 그렇게 챙길 게 많은지.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고 나면 아내를 깨운다. 아침 상을 차려주고 옷까지 챙겨 출근시키고 나면 벌써 9시.
겨우 집안이 조용해지지만 그렇다고 유유자적할 틈은 없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간단히 집안 청소를 하다 보면 금세 11시다. 이 때가 돼야 한 숨 돌리고 신문이라도 볼 여유가 생긴다. 묵상도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이 시간이다. 그리곤 혼자 점심을 챙겨먹는다. 처음엔 제대로 상을 차려 먹었는데 좀 귀찮아졌단다. 그래서 남은 반찬들을 양푼에다 다 쓸어담아서는 썩썩 비벼 먹는다. 치우기도 간편해서 좋다.
그렇게 오후 2시를 넘기면 아이들 간식을 준비한다. 가장 자주 하는 건 고구마 맛탕이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맞아 먹이고 아동대상의 선교 교육지 '빅 스터디(Big Study)'를 만들고 글을 쓴다. 얼마 전부터는 통장 일까지 맡아 이 시간이 더 바빠졌다. 2, 3일에 한번은 시장에 나가 장을 본다. 7시30분 쯤엔 아이들과 저녁식사를 한다. 바쁘게 치우고 나면 아내가 퇴근해 온다. 아내는 팀장으로 승진한 뒤에 일이 더 많아졌다. 밤 9∼10시 퇴근이 보통인데다 월말에는 12시를 넘기기도 일쑤다. 파김치가 된 아내를 위해 저녁상을 한번 더 차린다. 이런저런 대화를 잠시 아내와 나누다 보면 벌써 자정,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각이다.
남자들이 밖에서 빡빡하게 일을 한다 한들 이보다 얼마나 더할까. 석사 학위까지 있는 차씨는 1996년까지 유명 출판사의 편집장을 지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등 베스트셀러 여러 권이 그의 기획물이다. 독립된 사업을 한번 해보겠다고 사표를 냈다. "오, 탈자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출판일이 평생 하기에는 왠지 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육체적으로 힘들더라도 칼국수식당 같은 일이 매력적으로 보였지요. 그때 그런 소규모 창업이 붐이기도 했고요." 준비 중에 덜컥 IMF 사태가 터졌다. '아차' 싶어 다시 돌아가려 해도 가장 경기에 민감한 출판 쪽은 태풍을 맞은 뒤였다. 틈틈이 들어오던 교열, 대필 등의 간단한 아르바이트 거리조차 딱 끊겼다. "상황이 다급해지니까 여자가 더 강한 생활력을 보입디다. 취직을 했는데 제가 벌 때보다 수입이 더 낫더군요." (그는 아내가 남편 대신 혼자 일한다는 걸 부자연스러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 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얘기하길 꺼렸다)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차씨가 살림을 맡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그 유별난 남성적 정체성을 극복하기가 쉬웠으랴. 더구나 그는 충북 제천 고향 집의 가부장적 문화(할아버지는 얼마 전 돌아가실 때까지 갓과 도포를 벗지 않으셨단다) 속에서 성장했으니. "누가 차려주지 않으면 굶더라도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지요." 한 동안은 아내가 하루치 밥을 다해놓고 출근했다. 이마저도 찾아먹기 귀찮아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퇴근해 돌아온 아내는 부엌 싱크대에 잔뜩 쌓인 설거지감에 기막혀 했다. "이러려면 당신이 돈 벌어와요." 당연히 다툼이 있었을 수밖에. "제 자신을 잠재적 실업자라고 생각했어요. 곧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를 기대한 거지요." 그러나 상황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살림에 손대는 스스로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점차 고루한 가장(家長)의식에서도 벗어났다. "남녀의 고정된 역할이란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여건에 맞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면 되는 거지요." 말이야 쉽지만 그가 이렇게 새로운 역할을 완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3년이나 걸렸다.
살림은 뜻밖에 상당한 전문성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대충은 할 수 있어도 잘하기는 좀체 어려웠다. "숱하게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니트 셔츠를 세탁기에 넣었더니 축 늘어진 원피스가 돼 나온다든지…." 지금이야 색깔과 옷감별로 나눠 빨고, 기름 묻은 그릇을 분리해 설거지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면 표 안 나지만 안 하면 금방 티가 나는 집안 청소를 계획을 세워 후딱 해치우는 요령도 익혔다. 매일 먹는 반찬은 물론이거니와 김장도 맛깔스럽게 담그게 됐다. 단조로운 식단을 피하기 위해 TV 요리프로 등을 보며 공부한다. "혼자 연구도 많이 합니다. 할 때마다 맛이 달라지는 밥이 가장 까다로워요. 녹차나 다시마 우려낸 물을 써보기도 했지요. 그거 아세요? 묵은 쌀이라도 한번 씻어 어느 정도 말렸다가 밥을 하면 햅쌀밥 같아지는 거…."
'실전'에서 터득한 간단한 '살림의 지혜' 몇 가지를 부탁했다. "식초 몇 방울을 떨구면 기름기 있는 그릇, 변기나 벽의 찌든 때 등이 말끔히 닦입니다. 옷, 기저귀를 삶을 때나 도마, 칼 등을 세척할 때 사용하면 소독효과가 더 커집니다. 장판이나 냉장고 안팎, 화장대, 가스레인지 후드 등을 닦을 때는 알코올이 최고입니다. 냄새까지 없어지지요." 그는 이렇게 확인된 내용들을 인터넷 카페에 개설한 '인천댁의 살림주머니'를 통해 소개하고 신문에도 기고한다.
'인천댁'은 인천 작전동의 아담한 아파트에 사는 그에게 '동료' 아줌마들이 붙인 호칭이다. 인터넷 동호회 등을 통해 만나는 그들과 채팅 수다로 살림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고단한 주부의 삶을 달랜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회원들과 훌쩍 여행도 가고 찜질방에도 함께 갑니다. 40, 50대 아줌마들은 말이 잘 통하고 제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도 넉넉하지요. 오히려 20, 30대 젊은 여성일수록 '남자가 어떻게 살림을…'하며 어색해 합니다." 주변의 시선도 많이 편안해졌다. 처음엔 동성(同性)의 입장에서 '비분강개' 하던 동창들은 요즘은 "장가 잘 가서 팔자 폈다"고 농담을 건넨다. 학교 가정통신문에 부모의 직업을 바꿔 표기하던 딸도 친구들을 데려와 아빠의 모습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겉으론 "니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으실 시골의 부모님이 좀 걸릴 뿐이다.
"사실 요새는 살림에 꾀가 나서 대충대충 하는 게 많아요. 가계부도 잘 안 쓰게 되고요. 매달 뭐 좀 남는 맛이 있어야 쓸 맘도 생기는 건데 늘 빠듯하니…." 그의 푸념까지도 영락없는 보통 주부다.
차씨가 살림을 통해 배운 정작 중요한 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여자들이 쓸데없이 점심 때 나가 모여 외식 하는 게 거슬린다구요? 매일 텅빈 집에서 혼자 밥 차려먹는 심정을 몰라 그래요. 그깟 콩나물, 두부 몇백원 깎는데 그렇게 매달리느냐구요? 그런 자잘한 데 신경쓰지 않으면 살림이 꾸려지질 않습니다. 또 집에 늦게 들어간다는 전화 한 통화쯤 안 했다고 그렇게 화 낼 필요가 있냐구요? 무시 당하는 기분이어서 진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그는 매달 몇 차례씩 공무원 교육원 등의 의뢰를 받아 체험적 양성 평등론을 강연한다. "별것 없어요. 서로를 조금만 더 이해하면 됩니다. 남편이 제 밥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갖다 놓는 것, 그런 간단한 일부터가 시작이지요. 훨씬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
이준희/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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