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이국 땅에서 여생을 마쳐야 했던 오스트리아 출신 사회학자 알프레드 슈츠는 '이방인'이란 글에서 이방인을 '우리와 공동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 자'라고 정의한다.공동의 기억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함께 체험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면 이방인이란 곧 우리가 함께 했던 체험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우리와 함께 나눌 기억을 가지지 못한 낯선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나는 독일인들이 공동의 체험을 통해 공유하고 있을 기억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내가 아무리 이들의 역사와 문화, 그 삶의 흔적들을 추적한다 해도 난 이들이 살아오면서 함께 체험했었을 크고 작은 사건과 정치, 사회, 문화적 이슈들, 그에 대한 반응과 말,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남겨 놓았을 인상과 감정,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났을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태도의 변화, 이 모든 것들을 이들과 공유할 수는 없다.
다만 책과 사진, 기록과 자료들 속에 걸러져 남아 있는 메마른 '정보'를 참조할 수 있을 뿐 공동의 체험을 통해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체험된 역사를 이들과 함께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 유대인 추방과 학살, 전쟁, 분단과 베를린 장벽 붕괴 등 격정적인 현대사를 숨가쁘게 살아온 독일인들은 그것들을 함께 체험하지 못한 이가 공유하기 힘든 자신들만의 집합적 체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바로 이를 통해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형성해 왔을 터이다. 독일인들의 체험의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없는 한 난 이곳에서 계속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업이나 직장 등으로 인해 외국에 체류해야 하는 이들에게 더 큰 문제는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바로 그 시간 동안에 자신이 떠나 온 고국으로부터도 이방인이 되어 간다는 데에 있다. 그건 내가 부재하는 동안 고국에서 일어났던 역사를 내가 함께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과시한 월드컵과 그 이후 실시된 대통령 선거, 탄핵 사태로 촉발된, 우리 국민의 높아진 정치의식을 보여준 범국민적 촛불집회, 그리고 새로운 정치판에 대한 국민적 갈망이 드러난 17대 총선 등이 그것이다.
단 몇 년 동안에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역동적인 정치, 사회, 문화적 사건들을 체험한 한국민들은 이를 통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공동의 기억을 가지게 된 셈이다.
한국에 돌아가 이방인이 되지 않으려면 난 부지런히 저 기억의 흔적을 추적해야만 한다.
/김남시 독일/훔볼트대 문화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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