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대출을 늘리고 개인 대출은 까다롭게 운용할 것이다." (2002년4월 A은행 부행장) "중소기업 대출을 전년에 비해 50% 가량 확대할 것이다."(같은 달 B은행 임원)정확히 2년 전. 은행 여신 부문의 화두는 중소기업 대출 확대였다. 카드 부실과 부동산 가격 하락 조짐으로 이 무렵까지 무차별적으로 확대했던 가계 대출에 경고등이 켜지면서 대출 전략을 재편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해 1·4분기 중소기업 대출은 9조3,491억원으로 전년 동기에 비해 무려 698%가 증가했다.
은행들의 중기 대출 확대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리딩뱅크라는 국민은행을 필두로 기업· 우리· 신한· 외환은행 등이 대출 확대에 나서면서, 급기야 '노마진 대출'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한 시중은행 중기여신 담당자는 "정부가 가계 대출을 억제하고 나선데다 우량 대기업의 자금 수요가 없어지면서 중기 대출이 유일한 수익원으로 인식되던 시기"라며 "행장들이 직접 발로 뛰며 중기 대출 세일에 나서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1년여 가량의 확대일로 정책에 제동이 걸린 것은 지난해 6월 무렵. 중기 대출 연체율이 4%대까지 치솟으며 가계 대출에 이어 중기 대출에도 위험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시중은행들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이번에는 대출 회수 경쟁에 들어갔다. 국민은행은 중소기업 신규 대출 시 담보가 있더라도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이자비용)이 1 미만일 경우 대출을 제한하도록 심사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하나은행은 연초 25% 확대하려던 기업 금융을 10% 미만으로 축소했다. 급기야 그 해 7월에는 박 승 한국은행 총재가 직접 나서 국책 및 시중 은행장들에게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확대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부터는 은행들의 중소기업 대출은 그야말로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가계 대출 수요가 줄고 기업 경기가 조금이나마 살아난다 싶으면 너도나도 중기 대출에 뛰어들었고, 연체율이 높아지고 경기가 침체될 조짐을 보이면 다시 경쟁적으로 회수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한계선상에 있는 중소기업들은 은행의 방침에 일희일비하며 생사를 내맡긴 격이 돼 버렸다는 지적이다.
김상환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행들이 신용평가시스템에 근거해 미래의 부실화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한 뒤 대출을 취급해야 하는데 눈 앞의 경제 현실에 집착해 평가가 이뤄짐으로써 중기 부실을 더욱 초래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영업력이 없는 중기들은 은행들의 자금 지원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 만큼 오히려 이들의 자생력을 훼손해 결국 금융 부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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