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체호프 "갈매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체호프 "갈매기"

입력
2004.04.22 00:00
0 0

행간의 먼지를 들추니 보석들이 반짝였다. 14일부터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오른 '갈매기'는 서거 100년을 맞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4대 장막극으로 꼽히는 걸작. 극작가와 배우의 어긋난 연애를 중심으로 여러 인간 군상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이지만 뚜렷한 플롯도 없고 큰 사건도 벌어지지 않아 극화하기가 매우 까다롭다.러시아 연출가 지차트콥스키는 체호프가 남긴 여백을 다채로운 몸짓과 무대언어, 음악으로 채우며 베일에 싸인 '갈매기'의 매력을 유감 없이 보여줬다. 등장배우 10여 명 모두의 삶에 빛과 그림자를 던지면서도 시선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그의 저력은 대단했다. 왁자지껄한 웃음 속에 삶의 비애를 담는 솜씨도 노련했다. 무대 구석에서 쇼스타코비치와 바흐를 연주하며 극의 분위기를 조절한 피아노, 노래와 마임을 담당하고, 때로는 오브제가 되기도 하는 코러스의 존재는 극에 시적 분위기를 입혔다.

마술 같은 무대

러시아의 일류 무대미술가로 꼽히는 에밀 카펠류쉬의 깊고 넓은 무대는 마술적인 현실을 창조했다. 일렬로 늘어선 가로등과 나무 다리, 극중극을 위해 마련한 무대 뒤편의 무대, 기울어진 보트가 황량한 등장인물의 내면과 맞물렸다. 배우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반영한 무대활용도 돋보였다. 왼쪽 끝에 다리를, 오른쪽에 호수를 만들었다. 실제 호수는 없지만 물수제비 뜨는 소리, 푸른 색 조명으로 만든 무대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회전과 이동이 가능한 뗏목 위에 올라탄 배우들은 정말 배에 탄 사람처럼 몸이 흔들렸다. 연출가 트레플레프(오만석)가 확성기를 들고 나무 위에서 호수의 뗏목 위에 자리한 관객들에게 소리를 칠 때 객석은 아득한 거리감을 느꼈다. 물소리와 갈매기 울음, 검은 막을 찢고 쏟아지는 조명, 5m가 넘는 대형 샹들리에가 들어오는 극중극은 무대미술의 극치를 보여줬다.

정동환은 무대인사에서 연출가와 무대미술가를 무대 위로 부르며 "두 명의 마법사"라고 소개했다. 연출가 윤호진의 말대로 연출가는 지루할 수도 있는 체호프 작품에 다양한 동작을 부여해 재미를 살렸고 무대미술가는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두 마술사가 만든 성(城)은 눈부셨다. "취미는 논쟁할 수 없다" 따위의 대사를 "취미에 관해서는 니 맘대로 하세요" 등으로 재치 있게 옮긴 함영준의 번역은 배우들의 연기를 빛나게 했다. 익살스러운 정동환의 연기, 훌륭한 발성과 잘 계산된 몸짓으로 무대를 장악한 윤주상의 연기는 체호프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

웃음 속에 번지는 눈물

벌어지는 상황만 보자면 '갈매기'는 치정극이다. 작가 트리고린(남명렬)은 배우 아르카지나(정재은)와 젊은 배우 니나(이혜진)를 번갈아 유혹한다. 니나는 젊고 패기만만한 트레플레프에게 갔다가 바람둥이 트리고린을 택한다. 그러나 '갈매기'는 사랑과 질투의 작은 틈새에서 리얼리티를 건져올린다.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순정은 비웃음을 당하고 만다. 사랑받지 못한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늙고 지친 이들은 지나간 시간을 후회한다. 별다른 대사도 아니고 유별난 에피소드도 아닌데 웃음을 자아낸다. 연출가 아들과 배우 어머니가 서로 등을 때리며 아귀다툼을 벌일 때 웃음이 쏟아진다. 그러나 거기엔 소리 없는 눈물도 있다. 누구도 단 4시간 공연으로 인생을 담아낼 수는 없다. '갈매기'는 그것을 해낸다. 감동에 취했다가 깬 관객의 박수소리가 뒤늦게 터진다. 5월2일까지. (02)580―1300

/이종도기자 ecr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